님,
병원에서 ‘중대뇌동맥의 폐쇄 및 협착’이란 진단을 받았습니다. 혈관 벽 내부에 콜레스테롤 등이 쌓여 혈관 통로가 좁아졌다는 겁니다. 갑자기 막혔으면 뇌졸중이 왔을 텐데, 오랜 기간 천천히 막혀서 우회 혈관들이 발달했고 그래서 별다른 증상 없이 병원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네요. 물론 오랫동안 피웠던 담배를 끊고, 먹을 것을 세심하게 가려 먹고, 조금이나마 운동을 시작하는 등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인체는 젠장 신비롭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깨달음과 함께 ‘결코 되돌릴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생각이 시작됐습니다. 한번 경화된 혈관은 다시 이전처럼 돌아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죽종이 끼어 딱딱해진 이 혈관에 의지한 채 나머지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결코 벗어날 수 없을, 끝까지 발 딛고 살아가야 하는 이 지구란 터전은 또 어떻습니까. ‘혈관을 깨끗이 청소해준다’는 허황된 말을 저도 모르게 믿어왔듯 우리는 막연하게 이 지구가 언제든 ‘살 만한 곳’으로 다시 태어날 거라고 믿고 있는 건 아닐까요?
<아픈 몸을 이야기하기>란 제목으로 최근 재출간된 책에서 사회학자 아서 프랭크는 질병에 대한 서사 유형을 복원, 혼돈, 탐구 등 세 가지로 나눠서 다룹니다. ‘복원’은 질병이 없던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에, ‘혼돈’은 삶이 절대 나아지지 않을 상상에 기반합니다. 이와 달리 ‘탐구’는 고통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여행으로서, 아픈 사람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고 소통할 가능성을 열어놓습니다. 되돌릴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써나갈 것인가, 그것만이 문제입니다.
회사의 인사 발령으로 저는 이제 ‘책기자’ 자리를 내려놓고 앞으로 다른 영역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미약하게 출발했고, 작지만 여전히 소중하게 존재하고 있는 이 뉴스레터가 벌써 93회나 되었네요. 책을 통해 현실을 직시하는 이야기를 꾸준히 써내려갈 이 ‘반올림(#)책’을 앞으로도 주욱 사랑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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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인류 최초의 달 착륙은 경이로운 사건이었습니다. 미국과 소련 사이 자존심 대결을 겸한 달 탐사 경쟁은 이것으로 절정에 이르렀죠. 아폴로 우주인의 월면 산책은 1972년 12월까지 이어졌고, 그 뒤로는 아무도 달 위에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로부터 반세기 가량 잠잠했던 달 탐사 경쟁이 21세기 이후 다시 불붙고 있습니다. 중국은 세계 최초로 달의 뒷면에 무인 탐사선을 착륙시킨 데 이어 러시아와 함께 달에 영구 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미국 역시 오랫동안 중단했던 달 탐사를 재개하고 달 기지 건설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여기에다가 일론 머스크와 제프 베이조스 같은 억만장자들까지 상업적 우주여행과 우주 식민지 건설 경쟁에 나서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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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주탐사 바람엔 기후위기와 핵전쟁 및 소행성 충돌 가능성 등으로 지구 위의 생존이 불안하다는 위기의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천체물리학자 아메데오 발비는 이런 주장과 움직임에 비판적입니다. 그의 책 <당신은 화성으로 떠날 수 없다>는 달이나 화성에 인간 정착지를 건설하는 일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지, 어렵다 못해 불가능에 가까운지를 조목조목 따져 가며 설명합니다. 지구 밖 우주 궤도에 대규모 인간 거주지를 만든다는 생각, 태양계 바깥 ‘제2의 지구’로의 이주, 인공 동면이나 여러 세대에 걸친 ‘성간 방주’ 아이디어 역시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하답니다. 발비는 화성을 ‘테라포밍’하는 노력을 기울이느니 지구를 지속 가능한 곳으로 만드는 게 더 현실성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주탐사 경쟁이 이윤을 따지는 상업 논리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지적하며, 무한착취와 확장을 지구 밖에서 반복하는 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연장일 뿐이라는 일침이 따끔합니다. 그는 강조합니다. “지구 바깥에 또 다른 지구는 없다.” “지구는 우리의 진짜 우주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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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우주 시대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민간 기업들이라지만, 전 세계 우주 예산도 바야흐로 1000억달러를 돌파했다고 합니다. ”우주의 군사화”가 뚜렷해지고 있답니다.
🐟신유물론에 영향을 준 프랑스 학자 브뤼노 라투르의 개념들이 떠오릅니다. 그는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가 경험하는 지구는 사실상 지구 전체가 아니라 생존가능한 지구 표피의 얇은 생물권에 불과하다고 깨우칩니다. 지구에서도 ”임계영역” 밖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이, 저 먼 우주에 나가서 산다는 건 과연 가당키나 한 이야기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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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이란 말은 잘 뜯어볼수록 문제적입니다. 그것은 ‘한국에 대한 학문’일 텐데, 여기서 도대체 어떤 것이 ‘한국’에 들어가고 ‘학문’에 들어가는 걸까요? 그러니 한국학이 뭐냐고 묻기보다는, 지금 ‘한국학’이라 불리는 것을 누가 어떤 목적으로 구축해왔나 살펴보는 것이 더 적절하겠습니다. ‘앎은 곧 권력’이라고 보고 그것의 계보를 따졌던 미셸 푸코의 작업을 참고할 수 있겠습니다. 역사학자 육영수의 <근대한국학의 뿌리와 갈래>가 바로 이 작업을 수행하는 책입니다. 지은이는 19세기 조선의 문호 개방을 전후로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을 알기 위해 구축했던 지식 체계로부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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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그것을 참조해 ‘일본제국’의 버전으로 수용한 일본 관학자들의 작업, 한국의 고유한 무언가를 찾아내고 싶지만 이미 서양 선교사·일본 관학자가 닦아놓은 길을 참조할 수 밖에 없는 딜레마에 놓인 조선 지식인의 현실 등을 들여다봅니다. 언뜻 보기엔 이 각각에 1, 2, 3이라는 순서를 매겨야 할 것 같지만, 지은이는 제1물결, 제1.5물결, 제2물결이란 개념을 사용합니다. 시간 순으로 바통 터치하듯 벌어진 게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참고하고 모방하고 다시 쓰는 과정이 입체적으로 뒤얽혀 있다는 겁니다. 무엇보다 ‘지식-권력’이란 것 자체가 근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식민적 성격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도드라집니다. 객관적 진리를 실증적으로 탐구한다는 허울로 식민체제를 옹호해온 인사가 ‘한국학의 본산’이라는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을 맡게 된 지금, 더욱 깊게 읽어봐야 할 책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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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으로 최근 경제학자 김낙년 동국대 명예교수가 취임했습니다. <반일 종족주의>의 공저자인 김 원장은 뉴라이트의 산실로 불리는 낙성대경제연구소의 핵심 멤버로 꼽힙니다.
🐟미술사학자 우현 고유섭(1905~1944)은 한국 미술사의 선구자로 평가 받습니다. 지난해 말 나온 <고유섭 평전>은 그를 본격적으로 다룬 첫 평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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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한 대목이 최근 본 영화를 다시 한참 붙들었습니다. 여러 가지가 실로 대비되어, 행복은 도대체 무엇으로 구해지는지 가늠했습니다. 소설은 <도쿄도 동정탑>이고, 영화는 빔 벤더스 감독이 일본 배경 삼은 <퍼펙트 데이즈>입니다. 나뭇잎 사이 쏟아지는 볕을 가리키는 말이 일본어엔 있는데요, ‘고모레비’(木漏れ日)입니다. 매 순간 변화하는 고모레비를 은유 삼아, 영화는 매 순간 주어지는 행복에 대한 겸허한 태도를 찬미합니다. 영화는 또한 언어를 최소화합니다. 초반 한참을 대개들, 주인공이 말 못하는 자인 줄 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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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도쿄도 동정탑>은 말로 넘쳐납니다. 실체를 기만하는 언어, “예쁜 거짓말을 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는, “안쓰러울 정도로 열심히 문장을 쌓”는 AI마냥 그러나 본질을 회피하는 쭉정이 말들로 거대한 탑이 축조되고 마는 소설 속 세계는 또렷이 “일본어를 말하는 일본인이 모두 한 덩어리”로 보인다는 일본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한 말들로 없던 행복을 구축할 수 있다는 게 바로 소설 속 한 전개입니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엔 위로를 주는 건축물로 도쿄의 ‘스카이트리’(전파송출탑)가 자주 등장하는데요, 이에 필적해 근미래인 2030년 신주쿠에 구축된 마천루가 ‘도쿄도 동정탑’입니다. 이름만으론 무슨 구조물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출생 환경이 범죄 원인이므로, 범죄자 역시 “최초 피해자”로서 교화 대신 ‘관용’과 ‘동정’이, 즉 수감 대신 이제라도 행복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환경이 요구된다는 한 행복학자의 지론이 71층짜리 타워로 구현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정 용어 “수감자”는 ‘비참한 존재’를 뜻하는 “호모 미세라빌리스”라는 관념의 언어로 재정의됩니다. 원인과 대책, 사유와 사태를 휘젓는 말잔치 같달까요. 이런 말의 기만이 왜 ‘일본적’인지 저자는 숨기지 않습니다. 올 상반기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신예 구단 리에의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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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은 20세기에 들어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양자물리학자들의 양자이론으로 거대한 변혁을 거쳤습니다. 우주는 과거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역동적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 우주를 놓고 물리학자들은 무수한 가설로 그 시작과 끝을 설명하느라 각축을 벌입니다. ‘이런 가설 가운데 무엇이 타당하고 무엇이 타당하지 않은가? 무엇이 과학적이고 무엇이 비과학적인가? 물리학자들의 이론적 설명과 종교인들의 신앙적 믿음은 과연 얼마나 다른가?’ 독일의 이론물리학자 자비네 호센펠더(48)가 쓴 <물리학은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는가>(2022)는 지난 100여년의 물리학 발전이 낳은 수많은 물음을 아홉 가지로 간추려 솔직하고 과감하게 답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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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과학자의 생각과 종교인의 믿음을 비교하는 대목이 많습니다. 그래서 호센펠더는 과학과 종교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먼저 명확히 밝힙니다. “나는 (신이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하는) 불가지론자이며 비종교인이다. 그러나 종교적 신념에 반대하지 않는다. 과학은 한계가 있고, 인류는 언제나 그 한계 너머의 의미를 갈구해왔다.” 자신은 종교인이 아니지만, 종교인들의 의미 탐구가 ‘과학적 사실’을 존중하기만 한다면 문제 될 게 없다는 얘기입니다. 호센펠더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주장이 과학적 검증을 통과할 수 있느냐 없느냐, 혹은 과학적 지식과 양립할 수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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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희곡 작품이 한 편의 연극으로 무대 위에 올라가기 위해선 수많은 작업이 필요한데, 그중 핵심적인 것이라 말해지는 것이 바로 ‘드라마투르기’입니다. 우리말로는 ‘희곡작법’, ‘극작술’, ‘연출법’ 등으로 표현되곤 하죠. 국내 연극계에도 도입한 지 20년 가까이 흘렀지만, 여전히 생소한 개념이라 합니다. <햄릿 스쿨>은 배삼식 극작가·손진책 연출가가 2016년, 2022년, 2024년 함께 작업한 연극 ‘햄릿’이 탄생하고 진화하는 과정을 담은 ‘드라마투르크’ 박철호의 노트입니다. 작품마다 유연할 수 있으나, 드라마투르크는 대체로 작품에 대한 심화된 분석 자료를 분석·제공해 창작진이 제대로 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끄는 ‘조타수’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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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스쿨>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캐릭터 분석 과정입니다. 햄릿의 숙적인 숙부 클로디어스를 통해 선과 악의 모호한 경계를 어떻게 담아낼지, “목격자이자 증인”으로서 햄릿의 친구 호레이쇼는 어떤 의미를 부여받아야 하는지 등 드라마투르크가 제공한 자료가 배우들의 질의로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연출과 연기가 더욱 단단해지는 과정들을 구체적으로 만나볼 수 있습니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도 허투루 넘어가지 않고 분석하는 드라마투르기 작업이 한 편의 연극을 얼마나 풍성하게 창조해낼 수 있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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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을 맞아 아이들과 함께 갈 곳이 마땅찮을 때, 박물관은 정말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공룡부터 로켓까지“ 온갖 것들이 전시되어 있으니까요. <캣 패밀리 뮤지엄>은 박물관에 놀러 간 새끼 고양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접힌 부분들을 펼쳐서 확인해보는 재미까지 담긴 ‘플랩북’입니다. 명화 ‘반 고희 고양이 초상화’, 바이킹의 배에서 쥐를 퇴치한 고양이의 업적 등 고양이 세계에서 자랑할 만한 것들로 가득한 박물관이라는 점도 재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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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간 다니던 회사를 퇴직하고 휴식기를 갖던 중 서울의 한 소셜살롱에서 진행하는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만나고 글쓰기를 통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며 소통의 즐거움과 글쓰기의 효용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집 주변에도 이웃들과 만나 마음껏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어릴 때부터 책과 글쓰기를 좋아했던 점을 살려 책방을 열게 되었습니다. 서점 운영 초기에는 사람들과 활발히 교류하고자 하는 생각이 우선하였지만, 지금은 그뿐만 아니라 조명받지 못한 좋은 책을 찾아 많은 이들에게 소개하는 일에 더 큰 기쁨을 느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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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고양이
나는 ‘도둑고양이’라는 이름이 좋았어.
길들여지지 않는 뭔가가 있는 거 같잖아.
녀석들이 담장 위를 조용히 걸어갈 때
학교 가던 난 뭔가 도둑맞은 느낌이 들었지.
녀석이 한없이 태평하고 나른하게 하품할 때
난 뭔가 분명히 잃어버린 것 같았어.
녀석을 향해 살금살금 다가갈 때
달아나는 녀석을 향해 돌팔매질로 쫓을 때
난 내가 살아 있는 걸 느꼈어.
내가 잃어버린 게 뭔지 조금 알 것 같았어.
📖이만교의 동시집 <꼬마 뱀을 조심해>(그림 오정택, 상상)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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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반올림(#)책은 어떠셨나요?
좋았던 점, 아쉬웠던 점 등 기탄없이 의견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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