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미국의 1세대 페미니즘 작가 틸리 올슨(1912~2007)은 집안일·육아에 붙들린 여성이 과연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었습니다. 자본주의·가부장제 아래에서 다른 것들을 희생시켜가며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대가’들과 달리, 노동계급·무학자·유색인·여성은 그럴 수 없는 현실을 잘 알았거든요. 올슨은 창조적인 힘은 신비로운 게 아니라 계급·젠더·인종이 교차하는 물질적인 환경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올슨의 책 <침묵>(1978)이 나왔을 때, 캐나다 작가인 마거릿 애트우드는 당시 <뉴욕타임스> 서평에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천재에게 다락방이 좋고 예술가는 천국에서 만들어지며, 신이 그들을 보살필 거라는 믿음이 위안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틸리 올슨처럼 작가는 지상에서 길러지고, 누구도 반드시 그들을 보살피지는 않는다고 믿는다면, 사회는 문학의 길에서 무엇을 생산하고 무엇을 생산하지 못하는가에 관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동등한 우리>에서 인용)
서울국제도서전이 개막한 지난 26일, ‘작가노조 준비위원회’가 기자회견을 열고 “글쓰기도 노동”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기사보기) “‘고매한 예술’, ‘숭고한 창조’, ‘고독한 분투’라는 질긴 수사를 찢고 나”왔다는 말에서, 창조성에 대한 저 올슨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글쓰기는 “불안정 노동, 하청 노동, 종속적 노동”이기에 “작가들은 글쓰기 노동뿐 아니라 투명하고 공정한 계약 및 임금 지급을 요구하는 (두 번째) 노동을 겸해야만 한다”는 말에서도요. 작가노조는 내년 5월 출범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합니다. 부디 단단한 연대를 이루길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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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춤을 춘다면, 뇌성마비 장애인이 연기를 한다면, 시각장애인이 미술을 한다면….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모릅니다.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어떤 일들에, 어떤 몸들은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지곤 합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연극원·전통예술원에서는 “고도의 신체능력”과 “협업능력”을 결여했다거나 “이성적으로 작품의 완성도를 만들어가는 작업”을 하기 어렵다며 장애인 신입생을 뽑지 않아왔습니다. 과연 우리는 “지극히 차별적”이면서도 “온전히 평등”할 수는 없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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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를 타는 김원영(42)은 변호사로 일했고, 지금은 작가, 무용수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온전히 평등하고 지극히 차별적인>은 그가 자신의 성장 과정과 공연 무대에 서게 된 과정, 19세기 ‘프릭쇼’부터 오늘날 ‘장애 무용’을 비롯한 장애인 예술가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흐름 등을 토대로 삼아 ‘몸’에 대한 자신만의 사유를 펼쳐낸 책입니다. 한때 “아름다울 기회를 평등하게 만들겠다”고 생각했던 지은이는 자신의 무용수-되기 과정과 여러 장애인 예술가들을 경유하며 ‘자신의 몸을 온전히 믿는 것’에 가닿습니다. 지은이는 ‘능력’보다 더 큰, 구체적인 몸들이 서로에게 깃듦으로써 세상의 척도 자체를 바꿀 수 있는 ‘힘’에 주목합니다. “온전한 평등은 추상적 규범이나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능력’의 측면에서 지극히 차별적인 관계에 놓인 존재들이 상대의 ‘힘’을 존중하고 신뢰할 때 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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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를 타는 노르웨이의 언어학자 얀 그루에는 자신의 책 <우리의 사이와 차이>(아르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 몸에서, 상처 입고 뒤틀린 내 발목에서 벗어나고 싶다. 하지만 이 몸을 벗어난다면 나는 존재할 수 없다.” 김원영의 사유와 나란히 읽어보면 좋겠습니다.
🔗두려웠다, 휠체어에 앉아 있단 사실을 알아챌까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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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이송희일은 최근 몇 년 사이 에스엔에스에 기후, 생태, 자본주의 등을 주제로 한 글을 자주 올렸고, 이를 계기로 <기후위기 시대에 춤을 추어라>는 제목으로 첫 단독 저서를 펴냈습니다. 숱한 진단과 처방이 나와 있는데도 ‘문외한’인 이송 감독이 기후위기에 관한 책을 내기로 한 까닭은, 문제를 정확하게 보고 올바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가 보기에 기후위기의 원인과 해법으로 제시되는 것들의 상당수는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입니다. 무엇보다, 기후위기의 연원은 서구 제국의 식민주의와 자본주의에 있고 위기에서 벗어날 방도 역시 탈자본주의라는 점을 그는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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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와 관련해 흔히 나오는 ‘인류세’ 담론에 그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뭉뚱그려서 인류 또는 인간으로 통칭해서는 책임을 정확히 묻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서구 강대국들이 지난 몇백 년 동안 배출한 이산화탄소 때문에 기후위기가 초래되었으니 그 책임 역시 그들에게 물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기후위기의 최전선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은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 아시아의 가난한 민중들입니다. 기후위기에 대처한답시고 분리수거와 텀블러 사용 같은 개인적 실천을 주문하는 목소리들 역시 비판의 대상입니다. 엄청난 규모로 환경을 파괴하는 대기업들의 책임을 가리려는 호도책이라는 것이죠. 그는 또 전기차나 바이오연료처럼 친환경적 대안으로 꼽히는 기술들이 오히려 환경과 생태를 망가뜨린다고 지적합니다. 그의 주장은 명확합니다. 기후위기의 원인이 자본주의에 있는 만큼 생태사회주의 체제로 전환하는 것만이 진정한 해결책이라는 것, 그 모델은 이미 남반구 민중들의 저항과 실천에 다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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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문학판의 뉴스는 정지돈 소설가와 과거 교제했던 김현지씨 간의 ‘사생활 무단 인용’ 의혹 분쟁입니다. 한겨레 보도로 널리 공론화되었습니다. 이후 작가와 김씨를 인터뷰해가며 실체에 좀 더 밀착해보고자 했습니다. 사실 두 당사자의 엇갈린 주장을 놓고, ‘내막’이라고 할 ‘사실 진위’가 가려지긴 쉽지 않고, ‘의도’라고도 할 ‘내심’이 확인되긴 더 어렵겠습니다. 앞으로 비평과 제언이 나오겠지만, 과연 2020년 김봉곤 작가 사태 때의 논의 수준을 넘어설 수 있을까요. 새삼 또 문학의 폴리스 라인이 필요할까요. 지금 부족한 건 윤리에의 상상은 아닐까요. 작가들이 직접 소재로, 인물로, 자신의 문제인 양 ‘재현 윤리’를 탐색한 작품들을 되읽어본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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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상 작가의 첫 소설집(2022)의 표제작 ‘이중 작가 초롱’은 제목부터 중층화되는 작가 윤리의 형질을 감지시킵니다. ‘무엇을 어디까지 어떻게 활자·영상 따위로 드러내는가’가 통상 첫번째 재현 윤리라면 작가가 타자의 삶을 모티브 삼거나 인용할 때의 타당성으로 두번째 재현 윤리가 결부됩니다. 이현석 작가는 소설 ‘그들을 정원에 남겨두었다’(단편집 <다른 세계에서도>, 2021)에 실제 자신과 같은 의사 작가 ‘나’를 통해 소설 속 소설을 쓰는 소살가의 소설가로서 작품 안팎에서 자신의 윤리를 묻습니다. 박서련 작가는 ‘그 소설’(단편집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2022)에서 작중 여성 소설가의 임신중절 이야기로 작중 소설가와 소설 쓴 자신을 동시에 겨누는 오토픽션 형식의 문학적 무게를 보여줍니다. “누구도 훔쳐갈 수 없는 내 얘기” “절대로 흉내낼 수 없는 내 얘기”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이야기, 그러나 “누구나의 내 이야기가 되는” 정언명령이랄까요. 재현 윤리 바깥의 소설을 감별하는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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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세기의 로마인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고대 그리스 철학 정신이 라틴어로 옮겨가는 데 통로 구실을 한 사람입니다. 키케로가 말년에 쓴 <운명론>은 이 사상의 전도자가 그리스 철학을 어떻게 자기 것으로 소화해 새로운 언어로 표현했는지 생생히 알려주는 책이자, 신이 정해준 운명이 인간의 삶을 지배한다는 오래된 믿음을 반박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의지를 드높인 책입니다. 키케로는 그리스 철학을 두루 공부했지만, 그중에서 특히 사유의 바탕으로 삼은 것이 신아카데미아학파의 철학이었습니다. 플라톤 아카데미아의 적통을 이어받은 신아카데미아학파는 모든 것을 의심의 눈으로 보며 끝없이 탐문하는 소크라테스적 태도를 철학 활동의 근간으로 삼았기에 회의주의 학파로 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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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때의 회의주의(scepticism)는 진리는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학설이든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철저히 따져 묻고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탐구(skepsis)의 정신을 뜻합니다. 키케로는 그런 정신으로 당대의 유력한 학파였던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의 학설을 해부해 그 내적 결함을 드러냅니다. 이 책에서 키케로가 먼저 비판의 과녁으로 삼는 것이 ‘모든 일은 운명에 따라 일어난다’는 스토아철학의 운명론, 그중에서도 이 철학을 체계화한 크리시포스의 주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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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기습공격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격으로 시작된 ‘가자 전쟁’이 9개월째로 접어들었습니다. 6월24일 기준으로 팔레스타인 사망자만 3만7600여명인데, 대다수가 민간인에 그중 40%는 어린이라 합니다. ‘전쟁’이 아닌 ‘학살’이라 부르는 이유를 알 법합니다. 팔레스타인 작가이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문화부 장관인 아테프 아부 사이프는 전쟁이 시작된 2023년 10월7일 가자 지구를 방문한 참이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됐고, 그해 12월30일이 되어서야 국경을 넘어 이집트로 피신합니다. <집단학살 일기>는 그가 85일 동안 학살이 벌어지는 한복판에서 처절하게 써내려갔던 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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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제의 가족이 폭격으로 몰살되고 유일한 생존자인 조카는 양다리와 한 팔을 잃는 등 이스라엘군의 봉쇄와 무차별 공격 아래 “가자는 버려졌다”고 지은이는 개탄합니다. 친구를 포함해 언론인이 살해당하는 현실 속에서 지은이가 텔레그램이나 메시지 등을 통해 자신의 일기를 서구 유력 매체들에 악착같이 기고했던 이유입니다. 이스라엘의 미디어 통제와 세상의 무관심을 뚫고, 이 비극을 어떤 왜곡도 없이 전 세계에 알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폭발음과 비명, 슬픔과 절망이 넘치는 일기를 읽는 것은 당연히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결코 외면해서도 안 됩니다. “남겨두고 온 사람들을 생각하니 부끄러워졌다”는 지은이의 말에, ‘하루빨리 저 학살을 멈추라‘는 목소리를 나란히 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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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잘 나가는' 소아과 전문의였던 강병철 번역가는 이젠 캐나다에 살면서 전문 번역가로, 또 출판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자신이 당한 교통사고, 자녀의 정신질환 발병 등 갑자기 닥친 불운들이 그의 인생에 큰 변곡점을 만들었습니다. 얄궂지만 독자와 환자들에겐 참 고마운 일입니다. 전문 의학지식을 환자의 눈높이에 맞춰 풀어내는 그의 번역과 책은 출판계에서 늘 '믿고 보는' 대상으로 꼽히니까요. "목소리 작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될 것"이라 말하는, 또 문학의 품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강 번역가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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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가 직접 꼽은 주요 작품들의 표지. 왼쪽부터 장애와 자폐에 대한 편견을 없애줄 <자폐의 거의 모든 역사>(꿈꿀자유)과 정신질환 당사자와 가족을 위한 안내서 <사랑하는 사람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 때>(서울의학서적), 코로나19 시기 큰 관심을 끌었던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꿈꿀자유), 재즈의 명곡들을 소개하는 <재즈를 듣다>(꿈꿀자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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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된 ‘모두의 과학’을 나눠요
과학책방 사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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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이나 서점에서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하는 문학이나 인문사회에 끼워팔아도 어려울 것 같은 과학만 한다고 하면 너무 매니악하지 않나 싶은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과학은 이제 일상입니다. 과학은 모두가 누리고 있는 문화입니다. 과학책방 사이는 호기심이 충만한 어린이부터 이공계 진로를 고민하는 청소년, 만물의 작동원리가 궁금한 어른들까지 ‘모두의 과학’을 지향합니다."
👉기사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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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광체
발밑으로 돌이 굴러온다. 어디서 굴러온 돌일까. 쥐어보니 온기가 남아 있다. 가엾은 돌이라고 생각하며
걷다보니 또 돌이 굴러온다. 하나가 아니라면. 거듭해서 말해져야 하는 이야기가 있다면. 나는 간곡한 돌을 쥐고 있다. 바닥을 살피며 걷는 버릇이 생겼다.
돌이 온다 또 돌이 온다. 주머니는 금세 불룩해진다. 더는 주워 담을 수 없는데 계속해서 굴러오는 돌이 있어서. 나는 돌의 배후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무거운 돌은 무서운 돌이 된다.
사방에서 돌들이 굴러온다. 굉음을 내며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모르는 돌은 무한한 돌.
틀림없이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돌의 의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안희연 시집 <당근밭 걷기>(문학동네시인선 214)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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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반올림(#)책은 어떠셨나요?
좋았던 점, 아쉬웠던 점 등 기탄없이 의견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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