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얼마전 스웨덴 국립미술관이 소장한 작품 70여점을 만날 수 있는 전시회에 다녀왔습니다. 이른바 19세기 ‘북유럽 인상주의’ 경향에 참여했다는 여러 화가의 그림들을 구경할 기회였습니다. 야외에서 직접 빛을 관찰하며 그리는 ‘외광 회화’의 영향을 받아, 북유럽 특유의 광활하고 고요한 자연과 소중한 일광을 그대로 캔버스에 담아내려 한 각양각색의 시도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늑한 빛’이라는 소주제 아래 묶인, 실내를 그린 그림들도 흥미로웠습니다. 스웨덴의 ‘국민 화가’라 불리는 칼 라르손(1853~1919)의 그림들이 특히 인기가 많았는데, 그는 스웨덴의 호젓한 마을에 아내와 여덟 자녀들과 함께 가꾸고 만든 집에서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일상을 마치 공예품처럼 섬세하고 단아한 그림으로 많이 남겼답니다. 화려한 장식 없이 소박한 가구들과 그속에서 독서에 몰두하거나 휴식을 취하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따뜻한 미소를 짓게 만듭니다. 북유럽은 밤과 겨울이 길기 때문에 사람들이 실내에 머무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고, 그에 따라 자연히 집과 실내 공간에 대한 관심이 크다지요. 가구회사 이케아가 왜 칼 라르손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 듯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집, 그리고 가족은 때로 개인을 옭아매고 질식시키는 낡은 굴레로 인식되곤 합니다.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가부장제는 사유재산과 국가 지배에서 벗어난 가족이란 게 있을지 회의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오직 집과 가족으로부터만 찾을 수 있는 따스함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이 결국 환상이라 할지라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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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명이 늘고 고령자 비율이 늘어나면서 우리 사회에서도 ‘고령자 돌봄’이 화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노쇠해지고 병들고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누가 어떻게 돌볼 것인가에 대해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도 함께 고민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대표적인 여성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우에노 지즈코가 2011년 쓴 <돌봄의 사회학>을 소개합니다. 저자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위안부를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 <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 등 수많은 저서를 쏟아내 왔고, 국내에도 많은 책들이 소개된 바 있습니다. 900쪽이 넘는 학술서인 이 책은 출간해줄 출판사를 찾지 못하다 ‘오월의봄’이 출간하겠다고 나서면서 이제야 만날 수 있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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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저자는 ‘가족 돌봄’은 당연하지도 자연스럽지도 않으며 법적 근거도 없다고 말합니다. ‘과거엔 가족끼리 잘 돌봤다’고 말하는데 신화라고 말합니다. 가부장제에서 여성에게 임금을 지급하지 않고 가사노동을 전가하듯이, 고령자 돌봄 역시 ‘의존의 사적 영역화’이고 젠더 편향적이라고 말합니다. 저자는 좋은 돌봄을 위해 ‘복지다원사회론’을 주장합니다. 관(국가·지방자치단체), 민(시장), 협(시민사회), 사(가족) 부문이 모두 실패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네 주체가 분담과 협력을 통해 좋은 돌봄을 위한 ‘최적의 혼합’을 찾아보자고 주장하지요. ‘돌봄’에 관한 탄탄한 이론 전개와 함께 우리보다 더 빨리 초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일본의 각종 돌봄 현장 사례 연구를 실증적으로 분석한 책입니다. 복지 연구자뿐만 아니라 정책 담당자, 또 고령화 사회에 관심 있는 누구나 읽으면 좋을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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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적으로 '문화 전쟁'이 한창입니다.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고발하는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 캠페인을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로 맞받아치고, 소수자 혐오와 차별 표현을 그만두라는 주장에는 '정치적 올바름'이 표현의 자유를 망친다고 규탄합니다. 기후위기를 일깨운다는 '탄소발자국'이란 말은 거대한 구조적 책임을 가리고 개인의 책임만을 부각합니다. 쿠르드계 영국인 여성으로서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아리안 샤비시는 자신의 첫 책 <우리에겐 논쟁이 필요하다>에서 이 논쟁들을 더 나은 방식으로 심화시킬 방법을 제시합니다. '백인이라 역차별당한다'는 주장이 성립되지 못하는 이유부터, 논점을 이탈시키는 말과 반대만을 위해 만들어진 논리 등 공론장을 왜곡시키는 각종 술책들을 고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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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유색인종이 "백인 x새끼"라 말했을 때 그것은 '역인종차별'에 해당할까요? 지은이는 듣는 사람에게 모욕이 되는 표현이긴 하지만, 인종차별이 성립하기 위한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억압이 없는 한 일회성 욕설에 해당한다고 지적합니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말은 그 자체로 옳을지 모르나, 흑인의 생명이 소중하지 않게 취급되는 현실을 개선하기보다는 악화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라 합니다. 책은 이밖에 '정치적 올바름'을 "웃자고 하는 얘기에 죽자고 달려드는 행태"로 취급하는 것이 온당한지 등 다양한 논쟁들을 조곤조곤 비판적으로 따져 들어갑니다. 무엇보다 지은이는 온갖 차별과 억압을 만들어내고 이를 동력으로 삼는 자본주의를 문제의 핵심으로 겨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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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안 샤비시는 이 책에서 자신이 "언어와 개념에 집중"한다며, 어떤 단어와 개념이 이 세상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합니다. 부정적인 영향을 줄이면 세상을 더 낫게 만들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반면 독일 출신 언론인 르네 피스터는 <잘못된 단어>(문예출판사)에서 표현의 자유를 더 중시하는 입장에 섭니다. '정치적 올바름'을 두고 엇갈리는 두 입장을 이 두 권의 책으로 나란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정치적 올바름’ 집착이 강요하는 침묵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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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 오전 열린 두 권의 소설 출간간담회는 가도 그만 가지 못해도 그만이란 생각을 했었습니다. 두 작가를 한 자리에 부르는 간담회 형식도 변칙적이거니와, 소설을 읽어보면 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막상 가서야 두 작가가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두 소설마저 비로소 정좌해 찬찬히 보게되더란 걸 솔직히 고백해야겠습니다. 두 원로학자가 늦깎이 소설가로서 하나의 장편을 완성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은 뒤입니다. 이번주 소개해드릴 소설은 그렇게 두 권입니다. 안삼환 서울대 독문과 명예교수의 <바이마르에서 무슨 일이>와 김민환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의 <등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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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생 동갑의 두 명예교수, 아니 노작가는 같은 출판사에서 나란히 소설을 출간했습니다. 공교롭게, 모두 동학사상을 소재로 합니다. 평등, 민주, 사랑을 위한 민중적 저항을 형상화하는 것이죠. 출판사는 어떤 기획성이나 의도가 없었다고 합니다. 봉기, 전쟁, 종교의 동학이 아닌 사상이 동학이 소설에서 다뤄진 적은 거의 없습니다. 소설을 쓰기 위해 두 교수도 공부를 해야했답니다. 서구학문에 오래 천착하고 갈무리한 두 학자가 늦게 도달한 세계관으로 소설을 새벽까지 쓰며, 3년을 쓰며, 지난 시대와 삶을 조명하고 미래를 전망하려 드는 것인데, 둘 다 전작이 없진 않지만 아무렴 ‘문단의 외부자’가 벌인 일로 도대체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평생 ‘서학’에 천착한 원로학자들이 구한말 자생한 ‘동학’에 ‘무위이화’(자연스레 이뤄짐)하듯 귀착하기까지의 문제의식이 소설의 원동력입니다. 현 정부에 대한, 사대 세력에 대한 핏대 선 ‘작가의 말’도 바로 동학사상을 기준 삼고 있습니다. 소설을 매조지는 그 후기까지 꼭 닿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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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낳은 최초의 서사시로 기원전 2000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 탄생한 <길가메시 서사시>가 꼽힙니다. 그렇다면 인류 최초의 소설은 언제 태어났을까요? 최초의 소설은 <길가메시 서사시>와 거의 같은 시대에 고대 이집트에서 출현했습니다. 이집트학 전문가 유성환(서울대 인문학연구소 선임연구원)의 <최초의 소설 시누헤 이야기>는 고대 이집트 초기 소설 가운데 하나인 <시누헤 이야기>를 번역하고 해제를 단 책입니다. 고대 이집트의 역사와 언어, 문학과 종교에 관한 지식도 상세히 담아 소설의 이해를 돕습니다. <시누헤 이야기>는 근년에 영문 중역본이 나온 바 있지만, 원전 번역은 이 책이 처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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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는 고대 이집트어의 다섯 판본을 저본으로 삼고 여러 언어의 번역본을 참조하여 우리말로 옮겼습니다. 국내 이집트학 연구의 이정표로 기록될 만한 작업입니다. <시누헤 이야기>의 역사적 배경은 제12왕조를 개창한 아멘엠하트 1세(기원전 1985~1956)와 그 뒤를 이은 센와세레트 1세(기원전 1956~1911)가 다스리던 시대입니다. 이 소설에는 ‘찬가’ ‘비문’ ‘포고문’ ‘서신’ ‘일지’ 같은 당시 공식적 표현양식이 망라돼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이 소설은 서기관 양성 학교에서 교과서로 사용됐고, 학생들은 공문서의 본보기가 담긴 이 소설을 통째로 외우고 베껴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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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신경과학자 수전 배리는 어렸을 때부터 사시 때문에 사물을 입체로 볼 수 없는 '입체맹'이었다 합니다. 과학자들은 유아 시절에 감각을 익히는 기회를 놓치면 그 이후로도 그 감각을 얻을 수 없다고 여긴답니다. 실제로 후천적으로 시력을 얻은 뒤 우울증에 빠져 사망에 이른 사례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배리는 놀랍게도 마흔 살 넘어서 시훈련치료를 통해 입체시를 얻게 됩니다. 올리버 색스는 이 이야기를 '스테레오 수'라는 제목으로 <뉴요커>에 기고하기도 했다지요. 수전 배리는 자신의 책 <내게 없던 감각>에서 자신처럼 뒤늦게 새로운 감각을 얻은 두 소년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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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태어날 때부터 앞을 거의 보지 못했다가 15살 때 인공수정체 이식으로 시력을 갖게 된 리엄 맥코이입니다. 소녀는 태어났을 때부터 90데시벨 이하의 소리는 듣지 못했다가 12살에 인공와우 이식으로 청력을 갖게 된 조흐라 담지입니다. 새롭게 얻은 감각은 결코 그들에게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으며, 두 사람은 새로운 감각에 적응하고 그것을 쓰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고 합니다. 리엄과 조흐라를 알게 된 지은이는 10년 동안 끈끈한 유대를 이어가며 두 사람이 겪은 힘겨운 과정을 따라갑니다. 이 이야기는 "지각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성질을 갖고 있"기에 인간이 각자 그것을 바꾸고 적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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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작품 소개하려 출판사까지 차렸죠"
윤석헌 번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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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레모'는 조르주 페렉, 아니 에르노 등 현대 프랑스 문학 작품들을 주로 펴내는 '프랑스 문학 전문 출판사'로 유명합니다. 프랑스 작가들을 국내에 소개하고픈 마음에 윤석헌 번역가가 직접 차린 출판사라는 데에서 '프랑스 전문'이라는 말에 실린 무게감이 남다르게 느껴집니다. 문학으로 출발했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가정폭력과 여성 살해 다룬 소설 <아빠가 엄마를 죽였어> 등 출간 영토를 더욱 확장해나가고 있기도 합니다. 윤석헌 번역가의 '진심'을 만나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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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가 직접 꼽은 주요 작품들의 표지. 왼쪽부터 델핀 드 비강의 <충실한 마음>(레모)과 <고마운 마음>(레모), 아니 에르노의 대표작 <사건>(민음사), 조르주 페렉의 <나는 태어났다>(레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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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에 드는 햇살을 맞으며, 잠시 내려놓으시길
게으른오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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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짊어진 짐들을 내려놓고 이제는 오롯이 나 자신을 위해 살고자 마련한 공간입니다. 황혼의 독립입니다. 은퇴 후 생긴 시간이 버겁거나 ‘빈둥지증후군’을 겪고 있는 분들과 함께 여유 있고 게으르게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살아온 인생이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매 순간 최선의 선택을 하고 애쓴 자신에게, “당신, 참 애썼다”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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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공아파트
집은 어디에 있을까.
지금 살고 있는 집은 꿈에 나오지 않는다.
꿈에서 놀다가 피곤하면 아직도 한숨이 나온다. 엄마는 어디 간 걸까……
긴 복도를 한참 걷는다.
걸을 때마다 명찰과 열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이웃을 만나면 인사를 해야 한다.
엄마는 정말 어디 간 걸까.
괜히 냉장고 주변을 서성거린다.
나는 방에 들어가 양말을 벗고 이불을 덮는다.
피곤해서 자꾸 한숨이 나온다. 나는 언제까지 자라지 않을까.
누군가의 꿈속에 이렇게 오래 갇혀 있어야 하나.
📖이다희 시집 <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문학과지성사)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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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반올림(#)책은 어떠셨나요?
좋았던 점, 아쉬웠던 점 등 기탄없이 의견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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