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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단편소설의 대가 레이먼드 카버(1938~1988)의 두 번째 소설집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1981)은 극단적으로 절제된 문장으로 그에게 ‘미니멀리스트’라는 명성을 가져다주었는데, 나중에 편집자였던 고든 리시가 카버의 원고를 절반 이상 뜯어고쳤다는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됐습니다. 최근 출간된 <레이먼드 카버의 말>(마음산책)에서 카버는 생전에 무어라 했는지 들춰보다 제법 흥미로운 대목들을 발견했습니다.
사후 ‘스캔들’로 불거질 그 일에 대해 카버는 말을 아꼈으나, 나름대로 일관된 자신만의 서사를 전개했더군요. <사랑을 말할 때…>와 그다음 소설집인 <대성당>(1983) 사이 작품 세계의 변화가 있었다는 식입니다. 리시가 “같은 걸 열다섯 단어 대신 다섯 단어로 말할 수 있다면 다섯 단어를 써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는 회고는, <사랑을 말할 때…> 당시 “모든 대상의 뼈를 발라낼 뿐만 아니라 그걸 으깨고 골수까지 끄집어내려”했 던 자신의 작업에 리시가 줬던 지대한 영향을 확인해주는 듯합니다. 그러나 카버는 “그 방향으로 좀 더 가면 막다른 골목에 도달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그래서 <대성당>에서는 아무런 제약 없이 “그동안 제가 썼던 어느 것보다 크고 넓은 이야기”를 펴려 했다고 말합니다.
불안한 결혼생활과 파산, 알코올의존증 등에 시달렸던 카버는 여러 인터뷰에서 자신이 그것들 이후 ‘두 번째 삶’을 살 수 있었다는 데 감사해하곤 했습니다. 편집자의 영향력 아래에 머물며 '미니멀리스트'로서의 명성에 만족하지 않았던 것은 첫 번째 삶에서 벗어나려 했던 그의 끊임없는 시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길을 스스로 뚫으려 발버둥치다 끝내 “이 세계에 속한 것들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찾아낸 한 작가의 발자취에 새삼 존경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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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인터넷에서 책을 파는 사업 모델로 시작했던 아마존은 이제 이른바 '빅테크' 가운데에서도 가장 덩치가 큰 기업으로 일컬어집니다. 어디에나 존재하며 모든 걸 팝니다. 국내에서 공룡으로 성장하고 있는 쿠팡 같은 회사들이 모델로 삼고 있는, 공룡 중의 공룡이죠. 성공 신화를 만들어왔다지만, 성공만큼이나 큰 문제점들도 지적받습니다. 미국 비영리 탐사 매체 <프로퍼블리카>의 선임 기자 알렉 맥길리스가 쓴 <아마존 디스토피아>는 아마존이 미국 사회에 드리우고 있는 어두운 그늘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책입니다. 기자가 쓴 책답게 많은 지역을 무대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다채롭게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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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가 주로 드러내고자 하는 거대기업 아마존의 문제점은 '격차'를 만들어내고 확대한다는 사실입니다. 정보통신(IT) 산업이 중심이 된 세계는 이전 제조업 중심의 세계에 견줘 부자는 더 벌고 빈자는 더 가난해지는 '승자독식'이 두드러집니다. 플랫폼을 장악하기만 하면 지대를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죠. 아마존은 미국에서 지역과 지역, 부자와 빈자, 기업과 노동자 등 다양한 경계에서 이 승자독식을 일방적으로 강화합니다. 자신들의 이익 추구 이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관심 갖거나 구실하지 않으며, 세금 등 공적인 목적은 도외시하고, 반발 세력이 있으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꺾어놓고 맙니다. '미국적'인 맥락이 두드러지는 책이긴 하지만, 거대 플랫폼 기업이 하는 양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대목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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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는 최근 아마존 같은 거대 플랫폼 기업들의 독점이 낳는 폐해에 대한 비판과 이를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공정거래위원회 정도에 해당하는 연방거래위원회(FTC)가 아마존을 대상으로 반독점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배경입니다. 국내에서는 '플랫폼법' 제정이 효과적인 규제를 가능하게 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우리의 적들은 시스템을 알고 있다>(시대의창)는 디지털 거대 기업들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전략을 파헤친 책입니다. 닉 서르닉의 <플랫폼 자본주의>(킹콩북), 필 존스의 <노동자 없는 노동>(롤러코스터)도 함께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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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기후 저널리스트 제프 구델이 쓴 <폭염 살인>은 2023년에 출간되었는데, 그해는 산업혁명 이후 가장 더운 해로 기록되어서 책의 예견 능력이 화제가 되었답니다. 그러나 해마다 최고 기온 기록을 경신하다시피 하는 이즈음의 상황을 놓고 보면 그런 ‘예견’은 그닥 새로울 것이 없다 싶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올 여름이 예년에 비해 더울 확률이 크다는 예보가 있으니 말입니다. <폭염 살인>에는 무시무시한 더위로 목숨을 잃은 이들의 이야기가 차고 넘칩니다. 집 근처 등산로를 걷다가 변을 당한 일가족, 땡볕 속에 무리해서 일을 하다 쓰러진 이주 노동자, 정전이 된 요양원 안에서 속수무책으로 숨진 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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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폭염은 전 지구적 온난화의 가시적 발현일 뿐입니다. 우리는 폭염을 피하고자 에어컨에 의지하는데, 에어컨을 가동하는 데 필요한 전기의 상당 부분은 화석연료를 태워서 얻고, 화석연료를 태우는 과정에서 발생한 이산화탄소는 다시 지구의 온도를 높이는 역할을 합니다. 에어컨은 결코 폭염의 해결책이 아니고 도피일 뿐인 것이죠. 성층권 상부에 황산염 입자를 살포해 지구의 기온을 떨어뜨린다는 구상, “기후 싸움의 슈퍼히어로들”인 나무를 심는 방안, 청계천을 비롯한 생태계 복원 사례 등이 대안으로 제시됩니다. 파리 시의원의 말이 책의 주제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통째로 구워질 것인가, 도망칠 것인가, 아니면 행동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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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는 행동을 요구하는데, 행동해야 한다는 절박감은 때로 기후변화를 냉정하게 바라보지 못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을 기후의 탓으로 돌리려는 '기후주의' 태도를 경계하고 비판하는 책 <기후변화가 전부는 아니다>(풀빛)도 함께 읽어보시도록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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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해거름 서울 사당역 가까이서 황동규 시인을 만났습니다. 신작 시집 때문이었는데, 과거 오피니언 담당이었던 제(임인택)가 시인에게 정규 칼럼을 제안했다 성사되지 못한 이야기가 자연스레 오갔습니다. 2020년 5월, 하필 황반변성 안구 질환으로 크게 동요되던 때였던 것 같습니다. 글을 쓰자면 책을 읽어야 하는데 안구 질환으로 책을 읽을 수 없다는 겁니다. 담당 기자에겐 일상의 업무라 아쉬울 뿐이었는데 시인은 그때 미안함을 또 말씀하셨습니다. 보니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그리 길게, 더 지독해지리라 누구도 예상 못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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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에게도 생애 가장 큰 고통과 공포가 드리운 때였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낸 시집이 <봄비를 맞다>입니다. 시집은 코로나 초기인 2020년 펴낸 시집 <오늘 하루만이라도> 이후 4년 만입니다. 두 시집은 생애주기적 연작이겠으나, 퍽 달리 보입니다. 당시 시집엔 “마지막 시집이라고 쓰려다 만다”는 ‘시인의 말’이 적혀 있습니다. 거기에 노약자를 특히 죽음에 내몬 코로나 팬데믹이 더해졌으니 새 시집의 형색이 전망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반대입니다. 비유하자면, 4년 전 바람 따라 흘리던 ‘연’을 시인은 새삼 감고 풀고 당기고 내둡니다. 망연한 줄이 팽팽해지지요. ‘묘비명’ 제목의 시도 진솔한데 그건 닫는 시가 아니라 여는 시 같습니다. 제 욕망을 “가만,” 들여다 보는 시인, 삶을 삶으로 감당할 뿐이라는 시인. “좋은 날 궂은 날 가리지 않고/ 어디엔가 붙어 기고 떨어져서 기는/ 아프면 누워 기고 실수로도 기는/ 기느라 몸 없어진 것도 모르고/ 계속 기고 있는 몸 드러나겠지.” 늙은 소년의 욕망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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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철학계의 새로운 흐름으로 유물론의 귀환과 함께 신학의 귀환을 꼽을 수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유물론이 오랫동안 대척 관계에 있던 신학과 결합해 ‘유물론적 신학’이라고 부를 만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국 종교철학자 애덤 밀러(48)가 쓴 <사변적 은혜>(2013)는 신유물론 철학의 대부인 프랑스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1947~2022)의 형이상학을 바탕으로 삼아 새로운 신학의 구성을 시도하는 작품입니다. 특히 이 책은 그동안 기독교적 개념으로 이해돼 온 ‘은혜’(grace, charis)를 전통 신학의 틀에서 끌어내 라투르의 신유물론적 구도 속에서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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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초월적인 유일신은 존재하지 않지만 다른 모습의 신은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신은 객체들의 세계 안에서 다른 객체들처럼 은혜를 베풀고 고난을 겪는 신입니다. 밀러는 우리 각자는 다른 객체들의 은혜 없이는 스스로 설 수 없을 만큼 약한 존재임을 강조합니다. 신은 그 약함 속에서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런 신과 함께 우리는 서로 은혜를 베풀고 고난을 겪으며 존재한다고 밀러의 낯선 신학은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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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 대한 열 가지 신화>를 쓴 일란 파페는 이스라엘 출신 역사학자지만, 그 누구보다도 이스라엘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지식인입니다. 책은 어떤 사안을 두루뭉술하게 서술하거나 양비론을 펼치지 않습니다. 저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땅에서 식민지화되고, 점령당하고, 억압받는 팔레스타인인들을 대신해 권력의 균형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합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역사를 왜곡해 자신들이 벌이는 전쟁과 학살을 정당화하고 있는지 조목조목 짚어주고, 지금과 같은 비극의 기원은 서구의 ‘반유대주의’와 ‘시오니즘’이 결합해 벌어졌음을 분명히 합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은 물론이고 이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 모두에게 도움이 될만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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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이 주장하는 것처럼 원래 빈 땅이었고, 사막화된 이 곳을 시온주의자들이 와서 개척했을까요? 저자는 최신 연구결과를 토대로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또 팔레스타인의 무장조직 하마스를 우리는 테러리스트로 간주하지만, 역사적 맥락을 연구해온 저자는 “하마스는 해방 운동”이라고 말합니다. 서구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맞춰 정보가 생산되고 유통되는 ‘기울어진 정보 운동장’에서 이 책은 독자들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단비 같은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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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윤덕 작가는 <만희네 집> <꽃할머니> 등의 작품들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그림책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힙니다. 새 그림책 <행복한 붕붕어>에서 권 작가는 두 발 달린 붕어, 노점에서 파는 붕어빵이라는 색다른 소재들로 자연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새롭게 일깨웁니다. 그림책의 출발이 된, 생명을 귀하게 여겼던 아이누족의 전설로부터 나온 '생명의 노래'의 노랫말은 이렇습니다. “푸른 강 물고기 되어/ 인간 세상 나아가면/ 그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맞이하네 맞이하네.// 내 몸 기꺼이 내어 주고/ 다시 푸른 강물 되어/ 돌아오네 돌아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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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낭비할 수 있는 자유, 우리들의 낭만
서점 리스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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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리스본을 가장 잘 말해주는 것은 역시 ‘리스본’이라는 이름이겠습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라는 책과 영화에 기대어 있습니다. 스위스 베른에서 지루한 인생을 살아가던 주인공은 우연히 만난 책 한 권 때문에 난생 처음 마음을 따라갑니다. 책 속 인물들은 혁명의 시간을 살았습니다. 불길이 주인공에게 옮겨붙었습니다. 난생처음 마음을 따라갑니다. 훌쩍 떠난 리스본에서 만난 것은 다른 시선과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지루한 그를 두고 전혀 지루하지 않다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 그는 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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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울양반
동네 회의할 때 무경우로 우기고, 말도 안 되는 의견으로 끝까지 오기 쓰고, 앞뒤 없이 혼자 떠들어대고, 위아래 없이 안하무인으로 천방지축 혼자 주인공 노릇하는 사람 보고 동네 사람들은 “이울 양반 때문에 오늘 공사 다 글렀네” 하며 하나둘씩 사랑방 나가버렸다. 사랑방 사라진 지 오래된 지금도 해 저물면 텃밭 뽕나무에서 이울 양반 뿡알, 이울 양반 뿡알 하며 우는 매미 있다.
📖김용택 시집 <그때가 배고프지 않은 지금이었으면>(마음산책)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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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았던 점, 아쉬웠던 점 등 기탄없이 의견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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