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최근 에스엔에스(SNS)에 ‘반도체의 철학’을 테마로 한 풍자가 돌았습니다. 교육부가 대학이 전공 구분 없이 신입생을 뽑은 뒤 나중에 전공을 결정하도록 하는 ‘무전공 모집’ 확대를 추진한다는 소식( 👉기사보기)이 발단입니다. 문학·역사·철학 등 이른바 ‘비인기’ 분야의 전공자가 줄어들면 어쩌냐는 우려에, 인문학도 ‘융합교육’을 해야 한다며 “‘철학과 인공지능(AI) 융합’, ‘철학과 반도체’ 같은 과목을 개설해 대응하면 된다”는 교육부의 대답이 여러 사람들을 헛웃음 짓게 만든 모양입니다.
반도체가 문사철 분야의 연구 주제가 되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아니, ‘반도체 산업이 한국을 먹여 살린다’고 하는 만큼, 우리 사회에서는 절실하게 필요한 연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디지털 문명을 이루는 기본 토대인 반도체가 어떻게 ‘인간과 사물의 동맹’을 보여주는지 톺아본다거나, 반도체 글로벌 공급망 분석을 통해 미·중 패권 경쟁 시기 국제질서의 변동을 새롭게 포착한다거나, 국내외 반도체 공장의 산업재해 실상을 통해 성장제일주의와 국가주의의 민낯을 드러낸다거나…. 이미 많은 연구자들이 비슷한 연구들을 진행해왔거나 진행하고 있기도 할 겁니다.
다만 이런 연구들이 과연 교육부에서 의도하는 ‘철학과 반도체’ 연구에 해당할까요. ‘융합’이라는 말을 내세우지만, 그 속내는 차라리 ‘문사철도 놀고 먹지만 말고 나라를 먹여 살리는 반도체 산업이나 인공지능에 복무해보라’는 데에 더 가깝지 않을까요. 그런 의도마저 없는 경우가 더 최악일 겁니다. 어떻든 대학을 지원할 핑계만 만들어지면 상관 없다는 얘기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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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말로 하나의 인류인가?" 이게 왠 생뚱맞은 질문인가 싶겠지만, 한번 생각해 봅시다. 먼 옛날 인간은 산과 바다, 강 등 인간이 아닌 것들에도 '인격'이 있다고 믿고 그들과 대화할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아닌(때론 인간까지도) 모든 것들을 '자원'이라고 여기며 뽑아먹는 오늘날 인간과 같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 스스로 우리라고 여기는" 인류는 이 모양으로밖엔 살 수 없는 걸까요? 산과 바다와 대화할 줄 알았던 사람들의 세계는 문명인임을 자랑스러워하는 인류의 방문에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인류 클럽'에 속하지 않은 채 살아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브라질의 원주민운동가 아이우통 크레나키(69) 같은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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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종말을 늦추기 위한 아마존의 목소리>는 아이우통 크레나키의 강연들과 그의 생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글들로 이뤄져 있는 책입니다. '인류세의 종말을 앞둔 인류가 원주민의 지혜로 종말을 피할 깨달음을 얻는다' 따위의 기대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크레나키는 단지 종말을 '늦추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할 뿐입니다. 예전 원주민들에게 그랬듯, 인간과 자연을 나누고 자연을 자원으로 변형해온 인류 자체가 종말입니다. 인류라는 이름으로, 그러니까 우리가 문명이란 이름으로 자랑스러워했던 삶의 방식 안에서는 종말을 피할 수 없다는 얘깁니다. 조금이라도 종말을 늦추고 싶다면, 일단은 이것과는 다른 삶의 방식이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존재자가 인격을 지니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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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逆)인류학은 기존 인류학의 방향을 뒤집어, 서구 인류학이 탐구 대상으로 삼았던 존재들의 관점에서 인류학을 새롭게 만들고자 하는 흐름을 말합니다. <세계의 종말을 늦추기 위한 아마존의 목소리>에 이론적 배경을 제공하는 인류학자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카스트루의 작업이 대표적입니다. 그의 대표작 <식인의 형이상학>을 함께 소개합니다.
🐟포도밭출판사가 기획하여 지난해부터 펴내기 시작한 '월딩'(worlding) 시리즈 역시 서구와 비서구,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허무는 새로운 인류학 사조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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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난 서경식(1951~2023)은 70년대 한국으로 유학 온 두 형이 간첩으로 몰려 억울하게 구속되자 형들의 석방과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활동했고, 지난 30년 동안 <나의 서양미술 순례> 등으로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 작가입니다. <나의 미국 인문 기행>은 지난해 12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그의 유작입니다. 그의 부고를 접하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독립연구자 박권일은 <한겨레> 칼럼에서 “보편적 정의를 내세우지만 실은 승자·강자의 기득권을 옹호하며 약자·소수자를 억압하는 선별적 정의론”에 맞서 평생 싸워온 서경식을 추모하며 “서경식의 생물학적 삶은 닫혔”지만 “심원한 지성은 영원히 열려 있기에 그와 함께하는 순례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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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책을 30년 동안 만들어온 일본 고분켄 출판사의 편집자 마나베 가오루는 “서 선생님과 만나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가 말하는 내용이 동서고금을 종횡무진하며 종축(시간축)과 횡축(사색의 너비)의 사정거리가 너무 커서, 아무리 쫓아가려 해도 붙잡을 수 없는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 점이 너무 좋았습니다”라고 전합니다. 그의 드넓은 사유의 지평과 기품있는 글을 좋아했던 독자라면 그의 마지막 책을 상실감과 함께 집어 들 것이고, 그를 잘 모르는 독자라면 다양한 예술과 인문 정신이 만나는 이 책의 독특한 매력에 끌리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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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디아스포라 기행> 개정판이 나와 북토크를 위해 한국을 방문했던 서경식 교수를 만날 수 있는 영상입니다.
🐟<서경식 다시 읽기 2>는 서경식의 일본 도쿄경제대학 정년퇴임(2021년)을 기념하기 위해 동료들이 엮은 책입니다. 권성우 등 18명의 필자가 참여해 지난해 출간됐던 <서경식 다시 읽기>가 한국에서 기획된 기념문집이라면, 이 책은 일본에서 기획된 일본어판 기념문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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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소개해드릴 작품은 놓쳤으면 후회했을 소설가 박지영(50)의 <테레사의 오리무중>입니다. 빙판 위 이야기처럼 독자는 미끄러지듯 피식대며 읽어 나가지만, 빙판 아래 숨 막히는 삶의 진실이 결빙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은 언뜻번뜻 비치고, 돌 박힌 얼음장처럼 삐져나와 있습니다. 상상과 비현실이 버무려져도 그의 리얼리티는 세밀해질 뿐 흔들리지 않습니다. 박 작가가 설사 SF를 쓰더라도 ‘리얼리티’일 거란 생각이 들 만큼. 그의 삶이 궤적이 그러해서인지 모르겠습니다. 박 작가는 한겨레에 그가 “지금껏 단기계약직으로 선택받아야 했던” 삶을 담백하게 들려줬습니다. 안경, 화장품 영업, 마트, 식당 알바, 최근의 도서관 자료실 계약직 업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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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계산을―때로 좀스럽게―해야 하고 고심초사 선택하고 허나 그 계산은 거개 어긋나는 사람들이 박지영의 사람들입니다. 다만 이 궁박한 삶을 끝내 놓지 않고, 비관만 시키지 않는다는 데 박지영의 미덕, 박지영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는 “소설 속 인물들에게 무언가 좋은 것을 건네주기 전에는 단편을 쉽게 끝낼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분량은 길어지고, …동그랑땡 같은 것을 자꾸 빚어 먹이려고 아등바등”(후기)한다고, "(비정규직 중년 여성) 당사자로 배우고 쓸 수 있는 이야기들로 다른 입장의 인물들에 대한 독자들의 상상과 이해의 폭을 넓히고 싶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계산으로 바빠 군색하고 피로한 삶들을 '계산되지 않는 계산'으로 위로하려는 마음, 그것까지가 박지영의 리얼리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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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혁명은 프랑스혁명과 함께 근대 민주주의 체제 성립과 확산에 가장 중요한 모델을 제공한 정치적 변혁으로 꼽힙니다. 미국혁명의 정신은 1789년 미국 헌법 제정으로 구현됐는데, 이 헌법의 이론적·사상적 바탕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설명을 제공하는 역사적인 문헌이 <페더럴리스트 페이퍼스>입니다. 이 책자가 처음 우리말로 완역된 것은 1995년이었는데요, 이 문헌을 동일한 번역자(김동영 울산대 명예교수)가 29년 만에 개역해 다시 펴냈습니다. 1787년 5월 각 주 대표들이 필라델피아에 모여 13주를 연방국가로 통합하는 새 헌법을 만들었습니다. 이 새 헌법을 놓고 미국 지도층이 ‘페더럴리스트’(연방주의자)와 ‘안티페더럴리스트’(반연방주의자)로 나뉘어 대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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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페더럴리스트는 13주가 단일연방으로 통합되는 것보다는 몇 개의 국가연합으로 나뉘는 것이 더 낫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이때 반대 움직임에 맞서 알렉산더 해밀턴, 제임스 매디슨, 존 제이가 나서서 ‘왜 강력한 연방이 필요한지’ 설명하는 기고문 85편을 뉴욕주 신문에 연속으로 싣고 그 글들을 묶어 책으로 펴냈는데 그것이 <페더럴리스트 페이퍼스>입니다. 세 사람은 고대 그리스·로마 이래 수많은 정치체제의 역사를 두루 검토하면서 연방국가 건설이 필요함을 역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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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림(88)은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의 선구자로 꼽힙니다. 그는 한국 최초의 대지미술을 선보였고 한국 최초의 그라피티와 네온 미술을 시도한 작가이기도 하죠. 작가 경력 초기에 잠깐 유화에 손을 대긴 했지만, 그 뒤로는 유화와는 거리를 두고 퍼포먼스와 설치, 비디오아트, 판화 등으로 다양하게 영역을 넓혔습니다. 미술에만 머무르지 않고 음악과 연극, 영화 등으로도 한껏 뻗어 나갔고요. 작가의 정체성이라는 것, 고유의 작품 세계라는 것은 곧 정체요 자기 복제라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머물러 있는 건 예술이 아니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나아가는 것이 예술이라고 믿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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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미술 담당을 역임한 김종목 기자가 김구림과의 밀착 인터뷰를 바탕으로 쓴 <김구림, 끝장과 앞장의 예술>은 그의 다채로운 이력을 한눈에 보여주며 그것을 가능케 한 김구림의 예술 정신이 무엇인지를 끄집어냅니다. 한국 사회가 경제적으로도 뒤떨어졌고 정치·사회적으로는 억압적이었던 1960~70년대에 김구림의 실험미술은 화단 안팎에서 거의 인정과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흥미를 좇는 주간지의 가십성 기사가 그의 자리였지요. ‘팔리는’ 작품에 대한 거부감은 그를 더욱 외롭고 가난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꿋꿋이 자기만의 길을 걸은 결과 그는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열 정도로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렇지만 그 전시를 앞두고도 그는 주최측과의 이견과 불화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지은이의 말대로 “전위라는 건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도발을 감행하는 용기와 욕먹을 각오를 감당하는 배짱”이라는 사실을 김구림은 온몸으로 웅변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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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다고 하면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꾀병'을 부렸던 기억, 님에게도 당연히 있겠지요. 그림책 <꾀병 사용법>은 너무나도 안 풀리는 일이 가득한 날에 이 마법의 특효약인 '꾀병'으로 걱정을 날려버렸던 한 아이의 이야기입니다. 물론 뒷감당이 걱정되긴 하지만, 아주 가끔 꾀병을 부리면 꾀병인 줄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 주는 상대방의 따뜻함을 만날 수 있죠. 하지만 이 마법의 특효약을 너무 자주 쓰면 더 큰 부작용이 돌아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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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코로나19로 사람을 만나는 일이 불안하던 시절, 아파트 단지에서 탐조를 하기 시작했다. 탐조는 늘 멀리 어디론가 가서 새를 만나는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아파트에서 또 한번 놀라운 경험을 했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 아파트 단지에서도 새를 만날 수 있다니 정말 놀라웠다. ‘1년 동안 우리 아파트에서 새를 관찰하면 과연 몇 종의 새를 만날 수 있을까?’ 하고 혼자만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가 몇 달 만에 30종이 넘는 새를 관찰하면서 언니와 엄마 맹순씨가 함께하는 프로젝트가 되었고, 새를 보고 기록하는 프로젝트 그룹인 ‘아파트 탐조단’을 만들면서 전국 아파트에 사는 분들과 함께 기록을 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아파트에서 탐조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퍼져나갔고, 그 이듬해인 2021년 자연스럽게 도시 탐조를 주제로 한 국내1호 탐조 전문 책방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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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외 없음
식당에서 틀어놓은 뉴스 소리가 너무 커서 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폭격으로 가자지구의 병원에 있던 모두가 죽었다고 한다 우리는 숟가락을 든 채로 텔레비전을 본다 신이 너무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다 생선에 레몬즙을 뿌리고 살을 바른다 너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한다 들리지 않는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에 대해 세계가 하나될 수 없음에 대해 너는 말한다 들리지 않는다 기자는 병원 앞에 서 있다 폭발음이 들리고 폭발음이 또 들린다 귀를 막고 싶은데 신이 총을 들고 있어서 나는 두 손을 들고 있다 모두 죽을 것이다
📖강성은, <한국문학>(2024년 상반기)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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