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독일 감독 빔 벤더스의 영화 <이 세상 끝까지>(1991)에는 인간의 뇌파를 이미지 형태로 기록·재생해주는 기계가 나옵니다. 실명한 아내가 세상을 이미지로 볼 수 있도록 어느 과학자가 발명한 이 기계를 두고, 어머니에게 보여줄 세상의 이미지들을 수집하러 다니는 아들, 그에게 끌리는 수상한 여인, 기계에 눈독 들인 온갖 정보기관들 등이 얽히고설켜 전 세계를 무대로 ‘로드무비’가 펼쳐집니다.
이 영화에서 특히 흥미로운 설정 가운데 하나는, 시각장애인에게 이미지를 보여줄 용도로 만들어진 이 기계가 나중에는 인간의 꿈을 녹화해서 볼 수 있는 장치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등장인물들은 재생장치의 작은 뷰파인더를 통해 재생되는 자신의 꿈에 빠져 그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오직 재생장치를 구동시킬 배터리에만 신경을 쓰게 됩니다. 영화의 주된 메시지는, 사실 지금 보면 실망스러울 정도로 단순할 수 있습니다. 파편적인 이미지들만 범람하는 시대에 사람들은 진정한 소통을 하지 못하고 저마다 자기 안에 틀어박히는 나르시시즘에 빠지게 될 것이다… 정도일까요. 실제로 영화 막판 이미지에 중독되어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는 것은, 타자기로 정성스럽게 쳐낸 텍스트로 이뤄진 ‘이야기’입니다.
과학의 발전은 참으로 빨라서, 1999년에 고양이의 뇌 속 시각 정보를 이미지화하는 실험이 성공하는 등 ‘드림 레코딩’ 자체는 이미 충분히 가능한 기술로 여겨진답니다. 단지 아무 인과관계 없는 혼란스러운 영상들에 과연 어떤 효용이 있는지 의구심이 있다고 하네요. ‘이야기가 구원하리라’는 오래된 믿음은 어떨까요? 구닥다리 믿음이 되었을까요, 아니면 더 절실한 믿음이 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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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의 지은이 허준(1539~1615)에 대해서는 누구나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는 1990년대 베스트셀러 소설의 주인공이었고 드라마로도 몇 차례 각색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허준 평전>의 지은이 김호 교수(서울대 아시아연구소)의 생각은 다릅니다. 허준에 관해서는 올바른 지식에 못지않게 오해와 혼란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20여년 전 <동의보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가 새삼 허준의 삶을 다룬 평전을 내놓기로 한 까닭일 것입니다. 김 교수는 이 책에서 그간 잘못 알려졌던 허준의 출생 연도와 출생지를 바로잡는 한편 ‘동의보감’이 지닌 의미를 다각도로 짚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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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은 무관의 서자였기 때문에 과거에 응시할 수 없어서 의학을 택했지만, 명의로 이름을 떨치다가 내의원 의원이 되어 죽을 때까지 어의로 활동합니다. 선조는 왕세자(나중의 광해군)의 병을 치료한 그에게 당상관 작위를 내리고 당대 최고의 의서를 편찬하라고 지시합니다. 임금이 의서 500권을 내주는 독려에 힘입어 1610년에 완성한 것이 바로 <동의보감>(전 25권)입니다.
<동의보감>의 가장 큰 성과는 중국 의서에 한자로 나온 약재 이름을 한글로 병기함으로써 문자에 어두운 백성들도 주변에서 손쉽게 약재를 얻을 수 있도록 한 점입니다. 허준은 또 중국 의학을 북의와 남의로 나누고 조선만의 의학으로 ‘동의’를 정립합니다. 그러면서도 중국의 최신 의학 성과를 받아들임으로써 특수성과 보편성의 조화를 꾀했습니다. 노년의 그는 왕의 명에 따라 당시 조선을 휩쓴 잇따른 역병에 대처하는 의서를 편찬해 전파했는데, 이 책들에서 미신을 배제하고 경험적·합리적 대응과 사회적 연대를 강조한 점이 돋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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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자체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허준과 <동의보감>이 대중문화에서까지 꾸준하게 호명되는 것은 <동의보감>이란 저작의 힘에서 비롯할 것입니다. <동의보감>의 의미를 정리한 과학 칼럼니스트의 글을 함께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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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자리가 있으면 뒷자리도 있기 마련입니다. 부당한 일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은 앞자리에 서 있을 때 세상의 눈에 더 잘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싸움이 끝났다"는 말이 나온 뒤, 그 뒷자리는 그리 관심을 받지 못합니다. 반도체 직업병 노동자로부터 시작해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기록노동자' 희정은 <뒷자리>에서 그 뒷자리를 따라갑니다. 밀양에서, 매향리에서, 월성원전에서, '미투'와 콜센터 노동에서, 지은이는 과연 어떤 흔적을 발견했을까요? "싸움은 끝났다"는 일방적인 선언 너머에는 과연 무엇이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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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쇠사슬을 두르면서까지 반대했던 송전탑이 기어코 들어선 뒤, 그 송전탑을 매일 보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짐작하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원전에서 1킬로도 채 떨어지지 않은 마을에서 '이주 투쟁'을 벌였던 이들도, 미군의 폭격장이었던 갯벌을 여전히 삶터로 삼아 살아가고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들은 여전히 무언가를 붙들고 버티고 있지만, '응답'을 받지 못한다면 결국 소멸하고, 가라앉게 될 것입니다. 일터와 학교에 만연한 성폭력에 맞서는 일도, 쉽게 써먹고 쉽게 잘라낼 수 있다 취급하는 세상에 맞서 자신의 노동을 지키는 일도, 그렇게 무언가를 붙들고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의 힘으로 끊임없이 유전됩니다. "어떤 일은 분명히 무언가를 남깁니다"는 지은이의 말이 마음에 깊게 새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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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은 자신이 "살아가고 싸우고 견뎌내는 일을 기록"한다고 소개합니다.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2011)부터 <노동자, 쓰러지다>(2014), <베테랑의 몸>(2023)까지, 그의 작업은 일관된 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겨레21이 사랑한 논픽션 작가' 코너에서 희정 본인을 만나보시죠. 최근작인 <베테랑의 몸>에 대한 소개도 함께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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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국외에서 가장 많이 팔린 우리 문학작품이 뭘까요?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입니다. 2022년 봄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후보에 오른 뒤 출간된 미국판이 그해에만 2만5천부 넘게 팔렸습니다. 국내 개정판이 나온 뒤 지금껏 판매된 전체 추정치와 비슷합니다. 소설은 아랍어 포함 20개 이상의 언어권에 소개되어 있으니, <저주토끼>의 해외 전체 판매 부수에 국내 판매고를 견주긴 어려울 겁니다. 정 작가는 특히 서구권에서 인기 있는 이유를 그들에게 익숙한 옛이야기 형식(장르적)에 한국적 서사가 결합한 특성과 ‘단편인데도 불구하고 잘 읽힌다’는 해외 독자들의 반응으로 설명하더군요. “단편집은 잘 안 보는데, 이 책은 다 읽었다”는 유럽 독자들을 많이 만났다는 겁니다. 국내외 독자의 장르문학 취향을 알 만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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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는 정 작가의 새 SF 단편집입니다. '보수' 독자는 보지 마세요, 허들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장르인데다, 데모하는 작가의 이야기, 노동자 이야기 따위 투쟁에서 투쟁까지를 한 축 삼습니다. 학자 출신 노동운동가인 남편, 아들이 “교수가 될 줄 알았는데 빨갱이가” 됐다 타박하는 포항 죽도시장 상인인 시어머니, 지척에서 사라지는 해양생물종과 인간종이 주인공입니다. 공포와 분노의 근원을 사유하고 감각시키려는 집요한 방식으로, 이제껏 당도한 가장 내적 영역에서 ‘그렇게 데모하는 작가가 된다’를 말하려는 듯하지요. 그래서 출판사는 “첫 자전적 SF”라고 띠지를 둘렀지만, 한겨레는 달곰하니 연애 SF, 애틋하니 돌봄 SF, 어쨌건 맞서 싸우자 하니 사회파 SF란 말을 붙여봅니다. “노년에도 계속 데모하러 다니고 싶”다는 작가를 30일 밤 1시간여 인터뷰했습니다. 한겨레에서만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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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는 고대 그리스 철학 전문가, 그중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전문가입니다. 조대호 교수가 쓴 <영원한 현재의 철학>은 서양 철학과 학문의 토대를 닦은 세 철학자 소크라테스(기원전 470~399), 플라톤(기원전 427~347),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의 사상을 간명하게 알려주는 책입니다. 조 교수가 보기에, 세 철학자의 사상은 서양 정신의 오래된 토대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생생히 살아 있는, 그래서 ‘영원성’을 획득한 ‘현재의 철학’입니다. 그래서 책 제목이 ‘영원한 현재의 철학’입니다. 조 교수는 스승-제자로 이어지는 세 철학자의 드넓은 사상 세계 가운데 특히 ‘인간과 사회에 대한 성찰’을 살피는 데 중점을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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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책에서 가장 많이 살피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정치학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명제는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인데요, 이 두 명제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조 교수의 아리스토텔레스 논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성을 지닌 정치적 동물이 인간입니다. 그 이성을 지닌 정치적 동물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선의 정체를 아리스토텔레스는 ‘폴리테이아’라고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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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빠르게’를 외치는 사람들이 넘치는 세상이지만, 또 한편에서는 ‘느리고 고요하고 응시하는’ 명상에 관한 관심도 폭발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명상’ ‘마음챙김’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커진 가운데, 예술과 명상을 결합한 이색적인 책이 나왔습니다. 프랑스의 마음챙김 전문가 수아지크 미슐로가 쓴 <바라본 후에 다스리는 마음>입니다. 저자의 이력이 남다릅니다. 대학에서 미술사와 문학 및 영화를 공부한 저자는 우연히 명상모임에 참석했다가 명상의 매력에 빠져 전통 불교 사찰에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속세에서 벗어나 생활하는 ‘안거 수행’ 3년을 포함해 사찰에서 7년의 시간을 보내고 파리로 돌아온 저자는 현재 대학과 병원, 대중을 대상으로 ‘마음챙김에 근거한 인지 치료’와 엠비에스알(MBSR)을 강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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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100여개에 달하는 예술작품을 보여주면서 명상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한쪽엔 그림이나 사진, 건축 등 각종 시각 자료 등이 있고, 그 옆엔 명상에 관한 저자의 깊은 사유가 적혀 있습니다. 하나의 글은 매우 짧고 간단하지만 우리가 명상에 대해 흔히 갖고 있는 오해를 지적하거나 명상의 핵심요소를 아포리즘적으로 서술해 계속 곱씹게 됩니다. 예술을 매개로 명상으로의 초대장을 보내는 이 책을 들고 나의 내면 세계에 접속해보시는 것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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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설가들이여, 세계의 젊은 독자를 위해 써라
번역가 안선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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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선재 번역가는 지금 현역에서 가장 활발히 한국 문학을 세계 시장에 소개하고 있는 번역가로 꼽힙니다. 올해로 82살로 영국 출신인 그는 1994년 한국으로 귀화했습니다. 김수영, 천상병, 이문열 등 한국의 대표 작가들의 시와 소설이 그의 영역을 통해 국외로 진출했습니다. 처음 한국 문학을 번역했을 땐 이메일도 없던 시대라 직접 편지를 써서 국외 출판사 문을 두드렸다고도 합니다. 그의 모습에서 19세기 말 성서를 우리말로 옮기고 <춘향전> <구운몽>을 영어로 번역한 선교사 제임스 게일이 떠오르는 것도 무리는 아닌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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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가 직접 꼽은 주요 작품들의 표지. 왼쪽부터 이문열 소설 <시인>을 옮긴 <The Poet>(하빌프레스), 천상병 시선집 <귀천>의 영문판 <Back to Heaven>(코넬), 정호승의 시선집 <부치지 않은 편지>를 옮긴 <A Letter Not Sent>(서울셀렉션), 신용목 시인의 시선집 <숨겨둔 말>을 옮긴 <Concealed Words>(블랙오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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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 욕심 '잉어공주'가 있는 책방
빛나는친구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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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이니 독서 모임을 해야 한다고 동네 서점 사장님이 말씀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전 책방은 차렸지만 책을 사놓고 쌓아놓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책방 사장님들처럼 ‘찐한’ 독서가이거나, 멋진 서평을 쓴다거나 하는 책과 관련한 특별한 기술은 없었지요. 심지어 책방 개업 축하 공연을 스탠드업 코미디언 한기명, 김민섭 님이 열어주시고, 첫 모임으로는 제가 좋아하는 가족 시트콤 ‘순풍산부인과’ 인물 드로잉 모임을 열고, 언젠가 꼭 순풍 연기자분들을 우리 책방에 모시고 싶다 꿈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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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감기
감기는 목덜미로 온다더라 까치가 집을 짓고 있는 플라타너스 아래 낮 한 시 반쯤 옷깃을 세워주며 네가 말해주었는데 기억한다 우리는 횡단보도 앞에서 파란불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겨울보다 느리고 봄만큼 짧게 영상의 기온인데 감기라니 너는 걱정이 너무 많아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네가 말했지 사랑해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닌데도 미래는 오가는 것들을 잠시 세우고 죽은 듯 조용할 거였고 그럼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을 거였고 때 아닌 재채기 같은 마른가지 하나가 네 머리 위로 떨어졌다 너 대신 내가 올려다본 공중에는 가늘게 쪼개진 빛이 동그란 거처를 만들어 그늘을 품고 있었다 우리는 깔깔대며 웃었다 정말 그런 사이가 된 것처럼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유희경의 시집 <겨울밤 토끼 걱정>(현대문학, 2023)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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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반올림(#)책은 어떠셨나요?
좋았던 점, 아쉬웠던 점 등 기탄없이 의견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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