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교육’은 사람들의 분노에 쉽게 불을 지핍니다. 그러다 보니 ‘교육이 불평등을 대물림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사회경제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자녀들에게 ‘더 좋은 교육’을 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지위를 물려주고 때론 더욱 강화하고 있다는 것이죠. 학교는 단지 ‘좋은 학교’와 ‘나쁜 학교’로 나뉘어, 사회 전체의 불평등을 확산하는 주범처럼 취급되곤 합니다.
최근 출간된 미국 사회학자 더글러스 다우니의 <학교의 재발견>(동아시아)은 이런 통념에 일침을 가합니다. 학교가 불평등의 주범이란 시각은 미국에서도 주류 담론입니다. 이에 지은이는 “학교는 불평등을 만드는 주범이라기보다는 불평등한 현실을 반영할 뿐이며, 불평등을 더 심화하기보다 취약한 아이들의 불리함을 보완하여 불평등을 완화하는 기능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지은이는 단지 학교끼리 학업성취도 격차를 비교해 ‘격차가 이렇게 크다’고 말하는 기존의 연구 방법을 거부함으로써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한 시점만 반영하는 성취도보다 일정 기간 동안의 향상을 보는 ‘성장률’, 나아가 입학 전 성장률과 입학 뒤 성장률의 차이를 보는 ‘영향력’ 등을 비교해보니, 좋은 학교냐 나쁜 학교냐 구분엔 별 의미가 없었다는 거죠. 여름방학 기간보다 학기 중에 격차가 줄어드는 등 학교는 오히려 ‘평등 촉진자’ 구실을 한다고도 말합니다.
격차가 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격차가 결국 ‘학교 밖’에서 왔다는 사실입니다. ‘학교 밖’의 저 큰 불평등을 감당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는 너무도 안일하게 학교라는 이름의 허수아비를 때리며 되레 그 가능성을 짓밟아온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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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병 서울대 명예교수는 40년 가까이 대학에서 가르쳤고 숱한 연구서와 번역서를 낸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전문학자입니다. <능호관 이인상 서화평석> <범애와 평등: 홍대용의 사회사상> <연암을 읽는다> 같은 저서와 <골목길 나의 집: 이언진 시집> <나의 아버지 박지원>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 같은 번역서는 그의 이름으로 나온 수십 권 책의 일부일 뿐입니다. 연전에는 인지저하증으로 투병 중인 어머니를 간병하며 요양병원을 순례했던 날들을 기록한 책 <엄마의 마지막 말들>로 뭉클한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죠. 박 교수가 정년퇴직을 앞두고 2021년 봄학기에 한 학부 강의를 세 권짜리 <한국고전문학사 강의>라는 이름으로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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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단군신화에서 19세기 말까지 한국 고전문학의 주요 작가와 작품을 시간 순으로 서술합니다. 그렇지만 건조한 사실의 나열이나 자료의 인용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렇게 하면 학생이나 독자가 고전문학의 재미를 제대로 느낄 수 없을뿐더러 그런 것이 문학의 본령과도 거리가 멀다는 생각에서죠. 그 대신 박 교수는 문학에 투영된 인간들의 마음, 그들의 고통과 슬픔과 그 극복을 위한 노력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박 교수는 특히 문학 창작과 수용의 하위주체들을 부각시킵니다. 여성과 중인, 서얼, 천민 등이 그들이죠. 또한 토풍과 화풍이라는 개념을 통해 주체성의 문제를 중심에 놓고 문학사의 흐름을 조망하는 방식도 흥미롭습니다. 그가 번역서로 소개한 중인 역관 출신 요절 시인 이언진에 대한 파격적인 극찬에도 눈길이 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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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병 교수가 쓴 이전 책들에 대한 소개 기사들을 모아봤습니다. <한국 고전문학사 강의>는 지은이의 넓은 관심 주제와 깊은 연구 내공, 그리고 인간에 대한 애정 등이 유기적으로 집성된 결정판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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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미술관에 가서 함께 미술을 감상했어." 시각장애인이 아닌 사람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면 대개 이런 반응들을 보일 것입니다. "아예 안 보이는 친구?" "그러면 작품의 형태와 색깔을 볼 수 없잖아?" "만져볼 수 있는 작품인가?" 어쩌면 마음 깊은 곳에 우리는 '눈이 보이는' 사람만이 미술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고정관념을 심어두고 있는 게 아닐까요? 일본의 논픽션 작가 가와우치 아리오는 전맹(시력이 0) 미술 감상자인 시라토리 겐지와 함께 여러 미술관을 다닌 미술 감상 여정을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란 책에 담았습니다. 이들의 여정은 보이지 않는 위계와 차별로 우리 마음속에 세워 둔 여러 장벽들을 녹이고 허물어뜨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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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토리는 비시각장애인 동행자의 팔꿈치에 손을 슬쩍 댄 채 작품 앞에서 "무엇이 보이는지 말해달라" 합니다. 시라토리가 원하는 것은 공식 해설이 아니라 동행자 자신의 감상입니다. 설명과 대화를 이어가는 동안, 동행자는 더 세밀하고 새롭게, 솔직하게 작품을 보게 됩니다. 어떤 이는 그동안 호수라고 알고 있었던 것이 들판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기도 했죠. 이렇듯 시라토리와 함께하는 미술 감상은 본다는 것과 감각한다는 것을 넘어, 예술과 사회, 이 세계를 마주하는 우리의 존재를 되새기게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그 궁극적인 지평에는 '함께한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존재로서 마주하고 함께 웃을 수 있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이 책은 느끼고 새기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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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가와우치 아리오는 시라토리 겐지를 취재해 다큐멘터리(중편 <하얀 새>, 장편 <눈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씨, 미술을 보러 가다>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하얀 새>의 트레일러 영상, 그리고 농인 부모를 둔 '코다' 이길보라 감독이 이 작업에 대해 쓴 글을 함께 공유합니다.
🐟34개의 단편을 모은 앤솔로지 영화 <그들 각자의 영화관>에는 멕시코 감독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가 만든 <안나>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5분이 채 안되는 짧은 영화이니 한번 시간 내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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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노벨문학상 작가의 작품은 올 한해 판매누적치의 52배가량 팔렸다는군요. 주요 출판사들은 노벨문학상 발표 전 후보군에 대한 정보와 그 후보군들이 자사에서 출간한 책들까지 미리 언론사에 홍보한답니다. 아마 노벨문학상에 대비한 것일 텐데, 민음사는 욘 포세의 <멜랑콜리아>를, 은행나무는 미국 작가 조이스 캐롤 오츠의 <밤, 네온> 등을 이달 번역 출간했습니다. 한겨레 기자들도 어지간한 작가들의 이력과 작품을 섭렵하며 지난 5일 밤 8시를 기다렸습니다. 욘 포세가 선정될 경우를 대비해 노르웨이에서 번역 활동하는 손화수씨에게 한가위 전 글도 청탁했으나, 때마침 사정이 생겨 성사되질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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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보란 듯 욘 포세가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멜랑콜리아>는 포세가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국내에서 첫 번역 출간된 그의 작품입니다. 19세기 노르웨이 풍경화가 라스 헤르테르비그(1830~1902)를 주인공으로 하지만, 소설은 인물의 행적보다 심리 궤적을 쫓습니다. 가난과 망상, 자기비하에 고립된 채 죽고 사후 ‘신비주의적 풍경화’로 재평가된 화가를 되살리는데 그만한 형식이 있을까요. ‘인생은 언어로 표현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는 포세의 세계관 아래, 더더욱 “일반적 대화로는 불가능한 내면의 표출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독백”(송선호 중부대 교수)입니다. 이 소설엔 이야기를 견인하는 중대 사건이랄 게 없습니다. 내면이 곧 사건입니다. 그 내면에 적중할 때까지, 아기살(작고 짧은 화살)을 쏘듯, 언어를 분절하고 생략하고 환원하는 ‘포세체’는 실로 집요하면서도 퍽 유희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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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말~19세기 초에 흥성한 독일 고전철학은 서양 근대철학사에서 가장 광휘로운 지적 장관을 보여줍니다. 50년이 채 안 되는 이 짧은 시기에 칸트에서 시작해 헤겔로 이어지는 철학의 거대한 봉우리들이 잇따라 솟아났습니다. 이 사유의 격변에 추동력 구실을 한 사람으로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야코비(1743~1819)가 꼽힙니다. <야코비와 독일 고전철학>은 야코비를 중심에 놓고 이 논쟁적 철학자가 동시대 철학자들과 벌인 대결을 살피는 저작입니다. 멘델스존·칸트·피히테·셸링·헤겔이 야코비의 논전 상대자로 등장해서 치열한 대결을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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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난 야코비는 21살에 가업을 이어받았지만 철학과 문학에 심취해 8년여 만에 가업에서 손을 떼고 학문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야코비는 통상의 학문적 경로를 밟지 않고 당대의 수많은 학자들과 직접 만나 대화하거나 편지를 주고받으며 철학적 사유의 토대를 닦았습니다. 논쟁을 통해 성장한 사람이 야코비였죠. 그 야코비의 철학과 야코비가 비판한 철학들을 함께 만날 수 있는 책이 이 책입니다. 책이 출간되기 전 갑자기 세상을 떠난 독일 고전철학 연구자 남기호 연세대 교수의 유작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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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 이태원 참사 1주기가 다가옵니다. <제가 참사 생존자인가요>는 이태원 참사 당시 현장에 있었고 이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힘든 일년을 보낸 생존자 김초롱이 쓴 있는 그대로의 기록입니다. 이태원 참사 뉴스를 많이 본 사람들은 어쩌면 이 사건에 대해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은이가 책에 써놓은 참사 당일 이야기와 그 이후 그가 겪은 일들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무감하고 무지한지 알 수 있습니다. 지은이는 참사 직후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린 글에 자신의 '뒤집힌'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었는데, 아무것도 변한 것 없는 1주기를 맞아 이를 책으로 다듬어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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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안전 시민넷 공동대표인 김훈 소설가는 이 책의 추천사에서 “재난 참사의 모든 진실은 피해자 쪽에 저장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또 “참사를 개념화하거나 타자화하거나 정치화하지 않고, 피해자의 고통을 경청하고 공감하는 것이 비극에 접근하는 입구”라고 말합니다. 타인을 살리는 기록이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우리 사회가 느리지만 조금이라도 달라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생존자 김초롱씨가 “고통을 자원화”해서 들려주는 이야기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무지를 깰 수 있고, 변화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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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가 일어났던 날은 2022년 10월29일 밤. <제가 참사 생존가인가요>의 지은이 김초롱은 1주기를 앞두고 한겨레와 함께 다시 그 거리를 찾았습니다. "기억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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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늘 "안 돼"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리곤 그 냉담한 거절에 이내 무언가를 포기합니다. 우주 비행사가 되고 싶었던 스텔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스텔라는 코끼리였으나 그건 '아주 작은' 문제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항공우주국은 코끼리에 맞는 우주복이 없다고, 코끼리를 훈련시킬 사람이 없다고… 온갖 핑계를 대어 스텔라를 거절합니다. 그러나 직접 우주복을 맞추고 동료를 꾸리는 등 결코 도전을 포기하지 않은 스텔라는, 어느 순간 깨닫습니다. 더는 누군가의 '허락'이 필요없다는 것을요.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자신의 꿈을 이루도록 북돋는 그림책 <코끼리 스텔라 우주 비행사가 되다>(비룡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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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이야기가 넘치는 책방, 그리고 동네
아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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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오신 단골손님은, 오실 때마다 늘 여러 권의 책을 사세요. 무거우실 텐데도 한아름 책을 품에 안고 돌아가시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인터넷으로 편하게, 빠르게 주문하는 법을 모르시지는 않겠죠. 그럼에도 동네책방에서 ‘발견’하는 기쁨을, 편안하고 안전한 공간에서 소통하는 의미를 잘 알고 계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책과 서점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개브리얼 제빈의 소설 ‘섬에 있는 서점’ 속 한 구절에 얼마나 공감하실까요. “서점 없는 동네는 동네라고 할 수 없지.” 그렇기 때문에 동네에 어울리는 작은 공간이 넘치도록 책과 이야기를, 그리고 시간을 채워가기 위해 노력하는 아운트로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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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나는 노을을 좋아해
노을이 지면 내 그림자는 가장 길어져
한참을 엎드려 있었던 사람처럼
이때만큼 내가 가장 어두울 때도 없지
나의 가장 긴 그림자를 보지만
햇살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나와 가까워
나는 그게 고마운 것 같아
많이 기다렸지
이제 와서 미안해
📖이린아 시집 <내 사랑을 시작한다>(문학과지성사)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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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반올림(#)책은 어떠셨나요?
좋았던 점, 아쉬웠던 점 등 기탄없이 의견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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