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글 쓰는 게 일이지만, ‘쓰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새겨본 적은 별로 없습니다. ‘기자의 글쓰기’는 정보 전달이라는 실용적인 목적을 그 무엇보다 앞세우는 것이니 원래 건조하고, 밋밋하고, 덤덤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자기 검열과 마감에 쫓겨 글쓰기란 행위를 즐겨본 적도 없습니다. 어쩌면 ‘쓰는 직업을 가졌으니 그저 쓸 뿐’이라고 생각해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의 글쓰기’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은 정아은 작가의 에세이 <이렇게 작가가 되었습니다>(마름모)를 보며, 왠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문학상을 수상하는 ‘작가’가 되기만 한다면 그다음부터는 명성과 수입, 영예를 누리며 살 거라고 생각”했던 지은이는 자기 원고에 대한 출간을 ‘거절’하는 편집자의 메일을 받은 뒤 극심한 슬럼프에 빠집니다.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던지, 틈만 나면 인터넷 검색으로 다른 작가들이 원고를 거절당한 정황을 뒤쫓는 취미까지 생겼다고. “마음속에서 더 이상 작가가 아니었지만 현실에서 아직 작가로 행세”하는 것이 괴로워 “비장하게 다음 직업을 모색”하기도 했답니다.
제법 긴 시간을 거친 뒤 지은이는 다시 ‘쓰는 마음’을 찾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이 “언제나 글을 쓰고 싶어하는 인간”이라는 단순한 깨달음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 모든 것과 상관없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기쁘나 슬프나, 원고에 대한 거절 메일을 받으나 받지 않으나, 마음을 언어로 옮기고 싶어서 환장하는 것, 그게 글쓰기의 본질이었다.” 글 쓰는 직업이 아니라 ‘쓰는 마음’이 먼저 있음을, 결국 무엇이 되기가 아닌 무엇을 하느냐가 핵심임을 제 나름대로 다시 새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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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벌어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 암살,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 우리가 '동유럽'이라 부르는 지역에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동쪽으론 러시아, 튀르키예, 서쪽으론 독일, 오스트리아 등에 둘러싸인 이 지역은 민족과 종교에 기반한 수많은 정체성들이 뒤얽혀 "지구상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좋든 나쁘든 20세기의 가장 많은 사건들이 일어난 곳"이라 할 만합니다. 인간을 집단적으로 말살하는 범죄인 '제노사이드'란 말 자체가 이 지역에서 나왔다고도 하지요. 그러나 동유럽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피상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미국의 역사학자 존 코넬리의 <동유럽사>는 동유럽 지역의 복잡다단한 역사를 두터운 서술로 풀어나가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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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와 20세기의 지도를 비교하면, 제국과 왕국의 지배 아래 놓여 있던 이 지역이 수많은 '작은 민족'들로 나뉘어진 것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지은이는 이 치열했던 역사의 주인공은 바로 '민족'이라고 짚습니다. 유럽을 휩쓴 자유주의는 민족과 자치에 대한 다종다양한 상상을 일으켰고, 동유럽 지역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제국과 신민에서 스스로를 다스리는 민족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민족적 자아가 완전히 살아나기 위해선 '타자'가 필요"했고, 각자의 민족 프로젝트들이 서로를 물고 들어가며 민족은 끝내 '인종'이란 개념과 결부되고 맙니다. 무엇보다 동유럽 지역이 이토록 민족에 집착한 배경을 '절멸에 대한 두려움'이라 보는 지은이의 풀이가 흥미롭습니다. 자신들의 땅에서 자신이 이방인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야말로 이 치열한 역사를 추동한 원동력이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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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코넬리는 책의 '결론'에서 홉스봄, 앤더슨 등 민족에 대한 주류 담론들이 현실을 정확히 겨냥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근대'(출판이나 자본주의)의 영향이 있기 이전에도 말과 감정은 언제든 '민족'이 될 수 있는 핵심으로 존재했고, 그것에 불을 당기는 것은 무엇보다 그 존재를 부정하고 위협하는 힘이었다고요. 주류 민족 담론에 대한 비판을 담은 다른 책 한 권을 함께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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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뒤 일본에는 다양한 이유로 그곳에 건너간 60만여명의 '조선인'이 남아 있었고, 이들은 고국의 분단, 일본사회의 차별과 혐오를 견디며 '재일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스스로 벼려나가야 했습니다. 이들의 삶에 미술이 없었을 리 없건만, 재일조선인의 미술과 그 역사는 오랫동안 그 어디에서도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재일조선인미술사 1945~1962>는 그야말로 '최초'의 재일조선인미술사라 할 만합니다. 지은이 백름은 재일조선인 3세로, 이념의 대립, 무지에서 오는 편견 등으로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이 영역을 20여년 동안 파고들어 "동아시아 미술의 어느 한 부분"일 실체를 세상으로 끄집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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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부제는 1962년을 가리키는데, 이 해는 "재일조선인 미술가들의 작품을 재일조선인 미술가 자신의 손으로 엮어낸" 최초의 작품집 <재일조선인미술가화집>이 발간된 해입니다. 이를 이루기까지 김창덕, 백령 등 여러 재일조선인 미술가들의 활동이 있었고, 재일조선미술회 결성, 이념과 배경이 달랐던 민단계와 총련계가 함께한 두 번의 '연립전' 등 집단적인 노력도 있었습니다. 특히 지은이는 재일조선인 미술가들이 "여러 명의 창작자가 어떤 사건이나 사항을 공통 주제로 설정하여 각자의 해석을 근거로 작품을 제작하는 방식"의 '테마 제작'을 했다는 데 주목합니다. 이국땅에서도 4.19혁명 등 고국의 현실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때로 정치적이라 홀대 받을 지언정 변화를 추동하기 위해 이를 사실주의적으로 표현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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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인도계 가정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한 줌파 라히리는 비교적 이른 나이인 삼십 대 초반에 퓰리처상을 수상하며 일찌감치 문학적 위치를 굳힌 작가입니다. 그 뒤로도 문학적 평가와 독자의 사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아울러 잡으며 승승장구하던 라히리가 2012년 돌연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 로마로 건너갑니다. 특별한 연고가 없는 그곳에서 생활하며 이탈리아어를 배운 그는 급기야 이탈리아어로 산문과 소설을 쓰기에 이릅니다. 라히리가 새로 낸 <로마 이야기>는 그가 이탈리아어로 쓴 두번째 소설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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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는 아홉 단편이 실렸는데, 상당수가 이민자들을 주인공으로 삼습니다. 기후와 문화, 피부색이 다른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은 새로운 땅에 정착하느라 애를 쓰지만, 기존 주민들의 시선은 곱지 않습니다. 이민자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침범’하고 있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이들은 이민자들에게 무례하고 공격적인 언사를 퍼붓거나 물리적 폭력을 가하기도 합니다. 개중에는 불법 이민자들을 돕는 활동을 펼치는 이도 있고 어느 정도는 중간적이라 볼 법한 인물도 등장하지만, 상당수의 로마 원주민들은 매우 차별적이고 공격적인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영국 신문 가디언은 평소 문학과 정치에 거리를 두어 왔던 라히리가 이번 책에서는 상당히 정치적인 면모를 보였다고 서평에 쓰기도 했습니다. 라히리의 눈에 잡힌 로마와 그곳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한국의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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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비롯해 생전에 단행본으로 출간한 여러 저작 말고도 수많은 글을 남겼습니다. 이 글들은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춰 생산된 것들인데, 아렌트의 제자 제롬 콘이 이 글들을 시대순으로 엮어 두 권으로 펴냈죠. 그 하나가 아렌트 학문 인생 전반기에 산출한 것들을 모은 <이해의 에세이 1930~1954>(2005)이고, 두 번째가 2018년에 출간된 <난간 없이 사유하기>입니다. 이 두 번째 책에는 1953년부터 1975년까지 인생 후반기에 아렌트가 내놓은 논문·강연·대담 42편이 실려 있습니다. 첫 번째 책은 10여년 전에 한국어로 번역됐고, 이번에 두 번째 책이 우리말로 옮겨져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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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의 독창적인 사유의 흐름을 살필 수 있는 저작이자 아렌트의 아이히만 재판 관찰기로 유명해진 ‘악의 평범성’을 둘러싼 논란에 대한 아렌트 자신의 해명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여기 실린 글들은 아렌트의 일생이 아리아드네의 실이 끊어진 채로 어둠의 미궁을 헤쳐 나가는 모험, 난간 없이 오르는 사유의 모험이었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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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강신주가 다시 대중들 앞에 섰습니다. ‘거리의 철학자’로 불리며 대중들에게 ‘내 삶의 주인 되기’를 강조해온 그가 이번엔 ‘쓸모 있어야 한다’는 관념에 맞짱을 뜹니다. 그는 지난 23일부터 교육방송(EBS) 프로그램 ‘철학 대기획 강신주의 장자수업’(월~목, 밤 12시 방송)을 진행하면서 <강신주의 장자수업>이란 책을 함께 내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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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년전 중국 전국시대에 살았던 이 사상가를 지은이가 주목하는 이유는 이만큼 혁신적이고 자유로운 사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국가나 자본의 횡포, 생존과 경쟁을 위해 쓸모만을 강요하는 사회적인 억압이 심해지고 있는 요즘과 같은 시대에 고전 <장자> 속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맞는지 의문을 품게 하고, 무비판적이고 관성적인 삶에 대해 돌아보게 만듭니다. 지은이는 장자를 크게 세 가지 관점으로 정의하는데, 그 첫 번째가 `무용(無用)의 철학자'이고, 두 번째가 `타자(他者)의 철학자'라 합니다. 마지막은 장자가 모든 것을 하나로 수렴시키는 절대주의를 경계하고 세계에 담긴 다양하고 복잡한 문맥들을 인식했다는 점에서 '문맥주의자'라고 합니다. <장자> 속 48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삶을 긍정으로 이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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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는 <철학 vs 철학> 등 다양한 철학서들을 써왔으나, 그중 핵심 전공은 장자 철학이라 할 만합니다. 박사학위도 장자 철학으로 받았으니까요. 2007년 펴낸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모험>(그린비)는 그 고갱이를 담았다고 평가 받은 책입니다. <강신주의 장자수업>과 함께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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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인간들의 탄식과 슬픔이 나를 몰아붙였다
작가 서경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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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인 서경식 작가는 우리 사회에 '디아스포라'라는 '눈'을 넓혀주었는데, <나의 서양미술 순례>(창작과비평사)는 그의 첫 책이자 대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엄혹한 군부독재 치하에서 '재일교포 간첩'으로 몰려 수감된 두 형의 구명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시절, 그는 "지하실에 내던져져 있는 듯한 심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랬던 그에게 해외에 나갈 기회가, 그토록 열망하던 서양미술 명작들을 두 눈으로 볼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일개 분단국가 재외국민, 옥중에서 생명을 위협받고 있는 정치범의 가족"에게, 과연 미술이란, 예술이란 무엇이었으며 그가 직접 본 작품들은 그에게 어떤 이야기를 걸어왔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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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작가가 첫 책 이후에 쓴 자기 책들을 꼽아봤습니다. 왼쪽부터 두 번째 미술 에세이 <청춘의 사신>(2002), 독일 미술기행 <고뇌의 원근법>(2009), 음악 순례의 기록인 <나의 서양음악 순례>(2011), 조선미술 순례인 <나의 조선미술 순례>(2014)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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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충만해지는 만조를 기다리며
책방 밀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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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밀물 때는 온다. 바로 그날 나는 바다로 나갈 것이다.” 연남동 끝자락, 성산동 초입에 위치한 책방 ‘밀물’에 들어오시면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문장입니다. 앤드루 카네기가 신조로 삼은 문장을 그대로 책방에 옮겨 놓았어요. 밀물 때는 ‘내가 나로서 살고 있다는 감각으로 가득할 때’가 아닐까 싶어요. 이런 감각을 마주하는 순간은 읽고, 쓰며, 사유할 때고요. 읽다 보면 쓰고 싶어지고, 쓰다 보면 생각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또 알고 싶은 것이 생겨 읽고 싶고… 이 선순환을 좋아합니다. 책방을 찾아 주시는 벗들이 이 선순환을 통해 각자의 물때를 만났으면 하는 바람으로 책방을 꾸려 놓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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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하지 않았다
샤워를 하고 차를 마셨다
전화하지 않았다
텔레비전을 보고 음악을 들었다
가끔 전화기를 쳐다보았지만
전화하지 않았다
고양이를 목욕시키고 간식을 주었다
조금 화가 났지만
전화하지 않았다
과자를 먹으면서 책을 읽었다
왜 매번 내가 먼저 사과해야 하지?
따지고 싶었지만
전화하지 않았다
피자를 먹으면서 맥주를 마셨다
사과하게 될까 봐
전화하지 않았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전화하려고 마음먹었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김개미의 시, <자음과모음 2023 가을>(58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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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반올림(#)책은 어떠셨나요?
좋았던 점, 아쉬웠던 점 등 기탄없이 의견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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