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중년에 다다른 뒤에야 처음으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평생 여간해서는 스스로 당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법이 없었거든요. 어머니는 언제나 지극히 현실적인 과제들에만 몰두하는 듯했고, 그건 대부분 이 가족이 별탈없이 굴러가느냐 마느냐에 대한 것들이었습니다. 노년에 접어든 뒤엔 되레 ‘과거를 불태우려는’ 모습도 엿보였습니다. 아버지가 옛날 이야기를 꺼내면 ‘쓸데없는 소리’라며 못마땅해하거나, 옛날 사진이 담긴 앨범들을 두고 ‘몽땅 버려도 된다’고 한다거나….
‘엄마와 딸의 공동 회고록’이란 부제가 붙은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휴머니스트)를 보면서, 몇 번이나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누구의 아내이고 며느리이고 엄마”로 “그렇게 살다 보니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다는 지은이 어머니의 말이, 마치 저의 어머니를 대신하여 들려주는 말 같았거든요. 한 인간에 앞서 ‘어머니’로 먼저 존재하길 요구하는 압도적인 규정성 아래에 가족 ‘바깥’이란 없는 듯 살아온 한 여성의 내면. 구체적인 삶의 조건과 양태는 물론 다르지만, 제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면 그 아래엔 아마 같은 것이 흐르고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붙들고 다시 새기며, 지은이는 “이야기는 단지 우리의 과거, 경험, 기억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이거나 해방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제 생각은 결국 생각으로만 남았고, 1년여 전 갑자기 어머니를 떠나보낸 저는 여전히 어머니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없습니다. 드물게 남겨진 옛 사진에서 ‘어머니’ 아닌 어머니의 아련한 흔적을 더듬어볼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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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하는 동물'이라는 인간의 본성은 대체로 긍정적으로 여겨집니다. 이야기는 공감 능력을 높이고 사람들 사이를 묶어주는 구실을 하니까요. 그런데 영문학자 조너선 갓셜은 <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에서 '이야기의 역설'(이 책의 원제입니다)을 말합니다. 미처 주목하지 못한 이야기의 어두운 속성들이 우리를 극단적인 분열과 적대, 증오로 물들이게 한다는 지적입니다.
이야기는 선과 악의 대결을 전제하기 때문에 선과 함께 악도 퍼뜨립니다. 이야기가 불러일으키는 공감은 '우리'는 결속시키지만 '저들'은 배척합니다. 우리는 현실에서 벗어나 이야기 속 상황으로 이동(서사이동)할 정도로 몰입하는데, 이는 이야기의 효과를 강렬하게 증폭시킵니다. 문제는 우리가 언제나 이야기를 벗어나선 살 수 없는 '호모 픽투스'라는 사실입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우리는 이야기와 더불어 잘 살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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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조너선 갓셜은 진화생물학자인 데이비드 슬론 윌슨 밑에서 연구하기도 한, 문학과 과학(진화)을 접목하는 데 주력하고 있는 영문학자입니다. 이번 책에 대해 스티븐 핑커, 데이비드 이글먼 등 심리학자나 뇌과학자들이 '추천사'를 써준 것도 눈에 띄네요. 국내에 출간된 갓셜의 책으론 2013년작 <스토리텔링 애니멀>(민음사)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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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추측하고 그때그때 최선의 해석을 내놓는 뇌의 작용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감각 정보를 완전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뇌가 만들어내는 여러가지 '착시' 사례들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죠. 그런데 청각정보는 어떨까요? 물론 청각 체계에도 '착청'이 있습니다.
음악심리학자 다이애나 도이치가 쓴 <왜곡하는 뇌>는 대중에게 조금은 생소할 수 있는 소리(음악과 언어)와 뇌의 관계를 파고든 책입니다. 양쪽 귀에서 같은 소리를 듣는데, 오른손잡이의 경우 오른쪽에서 고음이, 왼쪽에서 저음이 나오는 듯 들리는 현상(옥타브 착청) 등을 소개합니다. 중국어 등 성조 있는 언어권에서 절대음감이 더 많은 이유, '수능금지곡'이 잘 잊혀지지 않는 이유 등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잔뜩 나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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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기반으로 만들어진 '챗지피티(ChatGPT)' 등 인공지능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뜨겁습니다. 챗지피티와 대화를 나눠본 사람들이 이리저리 공유하는 여러 경험담은 뛰어난 SF소설들이 먼저 제시했던 논점이나 사유 지점들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주목받는 SF작가 켄 리우의 소설집 <신들은 죽임당하지 않을 것이다>에도 오늘날 필요한 통찰들이 가득합니다. 예컨대 "(인공지능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세계에 관한 데이터뿐, 세계 자체는 아니었다"('신은 헛되이 죽지 않았다')는 말, 어째 최근 챗지피티와 대화해본 사람들이 하는 말과 닮지 않았나요? 다만 작가는 단지 이 지점에 머물지 않고, "감각과 경험을 품는 의식 자체가 환각일 수 있고, 그 환각이 되레 사회적 폭력을 야기하는 실태 등을 따지는" 등 '역사'를 의식한 채 새로운 이야기들을 펼쳐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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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계 미국 작가 켄 리우는 2012년 휴고상과 네뷸러상, 세계환상문학상을 동시 수상하며 파란을 일으킨 작가입니다. 3대 문학상을 동시 수상한 작품 '종이 동물원'은 국내에서 처음 출간됐던 그의 소설집 <종이 동물원>(황금가지)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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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렌 식수는 뤼스 이리가레, 줄리아 크리스테바와 함께 '프랑스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학자입니다. 대표작 <메두사의 웃음> <출구>(1975)에서 제시한 '여성적 글쓰기' 개념으로 유명합니다. 영국의 두 학자 이언 블라이스와 수전 셀러스가 쓴 <엘렌 식수>는 식수 사상에 대한 안내서로, 이 '여성적 글쓰기'가 어떻게 탄생해 어떻게 진화했는지 보여줍니다.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에서 '다중언어 사용' 가정에서 나고 자란 성장 배경 위에 60년대 프랑스에서 영향력을 발휘한 자크 데리다의 철학과 자크 라캉의 정식분석 이론이 식수의 사유를 키운 둥지가 됐다고 합니다. 서양 전통에 뿌리박은 로고스중심주의 뒤에 여성성을 두려워하는 남근중심주의가 있다는 인식, 그리고 언어로 이뤄진 상징적 질서를 깨뜨리는 실천 전략으로서 '여성적 글쓰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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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화성외국인노동센터'를 만들어 떼인 돈을 받아주는 등 어려움에 처한 이주노동자들을 돕는 활동을 펼쳐온 한윤수 목사는 그동안 자신이 만난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인터넷매체 <프레시안>에, 그리고 자신의 블로그 등에 연재해왔습니다. 이렇게 10년 동안 쌓아온 기록이 <오랑캐꽃이 핀다>는 10권짜리 책으로 나왔습니다.
퇴직금을 떼이고 산재를 당해도 어디 호소할 길 없고, 때로 폭행과 성폭행을 당하기도 하는 이주노동자의 현실은 크게 변한 게 없습니다. 지은이는 아시아 사람 모두가 동포라는 보편적인 인류애를 강조할 뿐 아니라 누구나 기피하는 업종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에 기대고 있는 우리 산업구조를 보자고 말합니다. 이주노동자를 통해 '목돈'을 벌면서 그들에겐 단지 '쌈짓돈'만 주려 하는 이 사회가, 과연 지속 가능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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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혹시 '나다움 어린이책'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나요?
성별 고정관념 아래 성 역할을 강조하는 내용이 두드러지는 어린이책들이 있습니다. 수동적이고 예쁜 것만 추구하며 질투가 심한 여자아이, 힘 자랑하며 남을 괴롭히고 걸걸한 남자아이에 대한 묘사 따위가 대표적이죠. 이런 책들을 통해 어린 시절 각인되는 고정관념과 편견은 다양성을 존중하고 성평등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데에 걸림돌이 되곤 합니다.
2019년부터 추진된 '나다움 어린이책'은 다양성과 성평등 가치를 담은 양서들을 선정해 추천하고 보급하는 민관사업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정된 책들 일부에 대해 "외설적이다", "'조기성애화'를 부추긴다" 등 트집과 다름없는 '공격'이 이어지면서 정부는 발을 빼고 사업 자체가 와해되고 말았습니다. 민간 전문가들만이 남아 '추천 목록이라도 만들자'며 고군분투해 내놓은 결과가 2021년 9월 출간된 <오늘의 어린이책>입니다. 표지가 '금서'를 의미하는 빨간색이라 '빨간책'이라 불렸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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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는 3월말, 드디어 <오늘의 어린이책 2>가 나옵니다! 아이들에게 성인지 감수성을 키워줄 좋은 책들을 읽혀야 한다는 소명 아래, 민간 전문가들이 재정적 어려움 등의 한계를 딛고 다시 한번 만들어낸 결과물입니다. 이번에는 온라인서점 알라딘에서 '북펀딩'을 진행했는데, 2주 만에 목표 금액을 초과했을 정도로 많은 응원과 지지가 모아졌다 합니다.
<오늘의 어린이책 2>는 "모두가 안전한 세상을 꿈꾸며" 노란 표지로 독자들을 찾아갈 예정이라 합니다. 빨간색에 이어 노란색, 계속 이어가면 무지개 빛깔이 되겠네요. 물론 가장 좋은 건 이런 작업 자체가 필요 없어지는 것이겠죠.
과연 어떤 책들이 어떤 이유로 선정됐을지, 미리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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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에 있는 책방에 왜 ‘선인장’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제가 좋아하는 그림책이 <선인장 호텔>(마루벌)이기 때문입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사와로’는 미국 남부의 소노란 사막과 멕시코 북부에서만 볼 수 있는 선인장인데, 이 선인장 덕분에 새들은 안전하게 알을 낳고 사막쥐는 새끼를 기를 수 있습니다. 사와로 선인장이 사막 생물들의 보금자리가 된 것처럼 책방 선인장도 도시의 삶에 지친 여러분의 다정한 휴식처가 되고 싶습니다. 또 한 가지 결정적인 이유가 있는데, 그건 책방에 오시면 아실 수 있습니다. 평창에 하나뿐인 책방, ‘책방선인장’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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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부름
사람을 따라가다 길을 놓쳤고 길을 따라가다 사람을 놓쳤다. 도착지를 몰랐지만 알게 된다면 왔던 길로 되돌아가게 될까 봐 지나온 발자국을 지웠다. 입간판에 홀려 따라 들어간 가게만 몇 군데인지 모르겠고. 심부름이 뭐였지? 골목은 복잡하고 기분은 넘쳐나고. 방향을 틀어도 될까? 발끝을 들고 절벽에 서 있는 것처럼 뛰어내리지 못한 생각들이 골목을 돌고 돌았다. 누가 시킨 건지도 모르는 두부 같은 건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조영란 시집 <오늘은 가능합니다>(시인동네)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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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반올림(#)책은 어떠셨나요?
좋았던 점, 아쉬웠던 점 등 기탄없이 의견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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