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학술적인 연구를 담은 책을 볼 때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은 새로운 개념들을 만나는 데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대상을 파고들어간 학자들은 나름의 사유로써 그것의 보편적 본질을 풀어헤치고, 그 결과를 개념으로 응축해 담아냅니다. 한국 근현대사 속 비규범적 존재들을 다룬 <퀴어 코리아>에서 만난 새로운 개념들을 새겨봅니다.
“우리는 미래가 없이 살고 있다. 그게 기묘한(queer) 일이다.” 일기에 쓴 버지니아 울프의 이 문장으로부터, 퀴어 이론가 리 에델만은 ‘미래’와 ‘퀴어’를 엮어냅니다. 에델만은 여기에서 ‘아이’라는 기표, 곧 미래에 모든 가치를 부여하고 이를 (재)생산할 수 있는 이성애와 그에 복무하는 섹슈얼리티에 특권을 부여하는 ‘재생산 미래주의’를 추출합니다. 가족과 국가가 강요하는 이 강고한 재생산 미래주의 아래에 동성애 등 ‘미래를 낳지 못할’ 비생산적인 것들은 배제되고 억압됩니다. 이를 비판하는 에델만은 미래를 가리키는 어떤 희망도 거부하고 ‘죽음 충동’(주이상스)을 충실히 따르는 길을 주장한 바 있습니다.
재생산 미래주의는 생산이 거듭될 단일하고 선형적인 시간성을 제시하지만, 다가올 미래는 현재에 이미 구축되어 있을 뿐입니다. 이런 서사에 붙들리지 않는 퀴어는 ‘퀴어 시간성’의 가능성, 곧 또다른 미래를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퀴어 이론가 호세 에스테반 무뇨스는 퀴어 시간성에 대한 통찰로부터 ‘퀴어’와 ‘유토피아’를 엮어내는 길을 제시합니다. “만일 이성애-선형적 시간이 우리에게 일상적 삶의 여기와 지금 이외에 어떠한 미래도 없다고 말한다면, (…)퀴어성은 유토피아적이고, 유토피아적인 것에는 퀴어한 무언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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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손진두(2014년 별세)는 1945년 부모, 동생과 함께 히로시마에서 피폭당했습니다. 이후 그의 부친은 오사카에서 원폭 후유증으로 숨졌고, 남은 가족들은 1951년 외국인 등록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국으로 강제 송환됐습니다. 손진두는 1970년 피폭 치료를 위해 일본으로 밀항했는데, 그의 사연은 피폭 치료 대상을 일본에 살고 있는 사람들로 한정해 사실상 한국인 등 외국인을 배제한 전후 일본 사회의 모순을 일깨웠습니다.
이때 손진두를 도와 일본 밖 사람들도 '피폭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결정이 나오도록 힘썼던 사람이 바로 다나카 히로시(86) 일본 히토쓰바시대 명예교수입니다. <공생을 향하여>는 당연한 권리 대신 씌워진 차별의 굴레에 맞서 자이니치(재일동포)들이 벌였던 기나긴 투쟁사의 산증인인 그의 인터뷰를 담은 책입니다. 자이니치 권리 투쟁은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가 어떠한 것인지 묻게 만들기에, 이 책의 제목에는 '공생'이란 말이 들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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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을 향하여>에서는 피폭 치료뿐 아니라 교육, 취직, 승진 등 여러 삶의 길목에서 가해지는 차별에 맞섰던 자이니치의 투쟁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특히 조선인 정체성을 지켜온 '조선학교'는 학교 폐쇄, 무상교육 배제 등 끊임없는 차별의 대상이 되어 그 상징성이 도드라진다 할 수 있습니다. 2006년작 다큐멘터리 <우리학교>(김명준 감독)를 함께 추천합니다.
🐟자이니치 2세인 윤건차 가나가와대 명예교수의 <자이니치의 정신사>(한겨레출판)는 "재일 조선인의 역사·사상·정신의 체계적인 서술, 이른바 총체적인 집대성"을 추구한 책으로 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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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분 도시', 말만 들어도 왠지 어떤 것을 이야기하는지 알 것 같지 않나요? "사회적으로 공간적으로 분산화되고 파편화"된 도시 속에서 과연 우리는 충분한 권리를 누리고 있을까요? 도시란 건 복잡한 유기체라서,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손대야 할지도 막막합니다.
'15분 도시'란 복잡계 과학자 카를로스 모레노가 창안한 개념으로, 생활 반경 안에서 주거, 일, 보건의료, 교육, 문화, 생활재 공급 등 기본적인 사회적 기능들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초점을 두고 도시를 바꿔나가자는 제안입니다. 안 이달고 파리 시장이 이를 실제 정책으로 현실화해 전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기도 합니다. <도시에 살 권리>는 '15분 도시'에 대한 모레노의 비전과 이론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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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비교문학을 가르치던 클로드 무샤르(82)는 1990년대 들어 한국 학생들을 하나둘 만나며 한국 문학을 알게 됐고, 특히 이상과 기형도에 사로잡혔다 합니다. "서점 한구석에서 무릎을 꿇거나 네발로 걸으며, 한국 시를 찾아" 읽은 그는 시 계간지 <포에지>에서 한국 문학을 소개하는 두 차례의 특집을 기획하는 등 유럽에 한국 문학을 알리는 '전도사'로 활약해왔습니다.
<다른 생의 피부>는 지난 20여년 동안 한국 문인과 작품에 대한 에피소드, 비평 등 그가 써온 글들을 추려서 우리말로 옮긴 책으로, 한국에서 나온 그의 첫 책입니다. 제목은 황지우 시인의 시구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번역이라는 '크레바스'를 의식하여, 한국 문학에 대한 자신의 판단에 스스로 의심을 놓지 않는다는 그의 태도가 무척 인상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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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지인들로부터 "너는 잠시라도 연락을 하지 않으면 한국으로 사라져버리는구나" 하는 말을 들을 정도로, 클로드 무샤르는 한국을 자주 찾아 한국 문인들과의 긴밀한 교류를 이어왔습니다. 과거 기사 두 건을 함께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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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후반 한국 사회에서 성과 관련한 담론이 분출하면서, 성소수자의 정체성과 이들의 문제의식도 일정한 '가시성'을 획득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 한국 사회에서도 '퀴어'가 없었을 리 없습니다.
토드 헨리 미국 캘리포니아대 샌디에이고 역사학과 교수가 엮은 <퀴어 코리아>는 다양한 필자들이 참여해 퀴어의 눈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분석하는 책입니다. 일제강점기, 권위주의적 발전국가 시기를 거치며 가족과 국가가 강요하는 강고한 이성애규범 아래 동성애처럼 비규범적인 존재들은 억눌리고 지워졌지만, 이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끊임없이 주체성을 실천하며 일방적인 권력 작동을 '문제화'해왔습니다. 서구 중심의 자유주의적 퀴어 이론과는 다른, 한국 근현대사에 새겨져온 비판적 통찰을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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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용품, 건축 등 우리가 일상생활을 영위하며 기대야 하는 수많은 물건들과 환경들은 대체로 '정상성'을 표준으로 삼아 만들어집니다. 한쪽 팔이 없는 사람, 태어날 때부터 키가 작은 사람 등에게 '장애'를 경험하게 하는 것은 신체 손상 그 자체가 아니라 이처럼 '다른' 조건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 만들어진 물건과 환경들일 것입니다.
기술과 장애의 연결점에 대해 고민하는 디자인 연구자 사라 헨드렌의 책 <다른 몸들을 위한 디자인>은 우리의 몸에서 출발하여 매일 사용하는 물건, 나아가 공간과 시간까지 누구도 불편하지 않은 세상의 가능성을 탐색합니다. 지은이를 따라 "몸의 조건과 세상의 형태 사이의 상호작용"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면 이 세상은 아직 미완성이며, 그렇기에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이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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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아동문학과 함께한 30년 번역 인생
번역가 김경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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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부터 꾸준히 독일 현대 아동문학을 번역하고 소개해왔기에, 의 서가에도 김경연 번역가의 책들이 한두 권쯤 꽂혀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를테면 <책 먹는 여우>(주니어김영사)나 개구쟁이 '알폰소' 또는 귀여운 고양이 '핀두스' 시리즈 같은 것들이요. 그림 형제의 작품들을 총망라하고 완역한 <그림 형제 민담집>은 그가 이룬 대표적인 성과로 꼽을 만합니다. 그는 지금 번역 인생의 마지막 대작이 될, 원고지 1만 매 분량의 번역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고 합니다. 5년 뒤 공개될 그 작품의 정체가 무엇인지 매우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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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가 직접 꼽은 주요 작품들의 표지. 왼쪽부터 <행복한 훈데르트바서>(현암사) <그림형제 민담집>(현암사) <나는 네가 보지 못하는 것을 봐>(사계절) '핀두스의 특별한 이야기' 시리즈(풀빛) 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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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교육을 하는 시민단체에서 10여 년을 활동가로 일했다. 유아부터 노년층까지 환경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실행하고, 직접 교육을 진행하기도 하는 동안 놀랐던 점은 교육을 통해 만난 사람들 대부분이 환경문제가 일어나는 이유와 실천 방법을 어느 정도는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사는 지구는 점점 더 상황이 안 좋아지고 있는 걸까? 머리에는 물음표가 자꾸만 생겨났다. 그 답을 찾기 위해 열심히 책을 읽었다(무엇이든 궁금증이 생기면 책부터 펴는 사람이기에). 자연을 알고 싶어서, 이런 위급한 지구의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어서.
그렇게 책을 읽다가 문득 내가 이제껏 하던 방법 말고 다른 방법으로 사람들을 만나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기후위기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요? 왜 우리는 과학자와 생태 철학자들의 오래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막지 않았을까요? 왜 인간은 다른 생명을 그토록 못살게 괴롭히는 걸까요? 저는 정말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가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세상을, 무엇보다 인간을 이해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무작정 문을 열었다. 환경책방이 아닌 생태책방을. 인간과 비인간 생명 모두가 서로 관계하고 이해하고 응답하는 공간이 되기를 희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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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세계
우리는 무슨 색깔로 피어날지 몰라서
영원히 편식을 하고 싶어서
어른들을 사냥하지 않았다
더운 피로 입김을 뿜는 짐승처럼 의기양양했다
눈 속에서 발견한 한 구의 검푸른 시신에
누가 먼저 키스할지 내기를 하면서
공중에서 흩어지는 문장 사이를 날뛰었다
우리는 내일을 믿지 않았다
📖전수오 시집 <빛의 체인>(민음사)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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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았던 점, 아쉬웠던 점 등 기탄없이 의견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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