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악은 이토록 거침없이 자신의 길을 가는데 어째서 선은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가.”
최근 종영한 한 드라마에 나온 대사를 듣고, 선과 악의 모호한 경계 앞에 선 우리 인간 존재의 한계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삶은 우리가 통제하는 우리 내부가 아니라 우리 외부에서 저항할 수 없는 폭풍우처럼 밀려옵니다. 인간은 그것을 때론 행운으로 때론 불운으로 점쳐보고 대비해보겠다 설쳐보지만, 운명은 그런 것 따윈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포르투나(운명의 여신)가 가혹하게 굴려대는 수레바퀴 위에서 이리저리 휘둘려지는 것이 너무도 괴롭기에 사람들은 그의 머리끄덩이를 붙잡아서라도 그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포르투나는 종종 앞머리나 뒷머리를 아예 밀어버린 모습으로 그려진다지요.
앞서 말한 드라마에서는 ‘강한 힘’을 추구하는 자가 악인으로, 나약하고 하찮다 여겨지는 존재들을 ‘지키려’ 하는 자가 선인으로 그려집니다. 외부에서 난폭하고 변덕스럽게 찾아오는 저 포르투나의 힘을 통제할 수 있도록 그보다 더욱 강한 힘을 가지고 “거침없이 자신의 길을” 가고 싶은 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는 욕망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욕망이 바로 선인의 세계와 악인의 세계를 가르는 강, 짙고 뿌연 안개로 뒤덮인 그 강을 건너게 하는 나룻배입니다. 일단 그 강을 건넌 자는 건너편 역시 폭풍우가 치는 황무지일 뿐이며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끝끝내 나약하고 하찮은 존재로 남을 뿐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저 지키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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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라고 하면, 흔히 피렌체 대성당의 크고 아름다운 돔 같은 건축물, 인체의 아름다움을 한껏 표현한 아름다운 미술 작품 등이 떠오릅니다. <브루넬레스키의 돔> 등 여러 저작들을 통해 르네상스 시기를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보여준 역사학자 로스 킹은 가장 최근 내놓은 저작 <피렌체 서점 이야기>에서 '서적상', 그러니까 책 판매자를 통해 피렌체 르네상스를 들여다봅니다.
주인공은 바로 베스파시아노 다 비스티치(1429~1498). '새로운 아테네'를 꿈꾼 인문주의자들에겐 고대 그리스 로마의 고전들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되살려내어 퍼뜨리는 일이 곧 르네상스였습니다. 그러니 그 모든 작업에 관여하며 평생 최소 1천권의 필사본 책을 만들어낸 베스파시아노야말로 르네상스의 가장 한복판에 있던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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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문학사가 스티븐 그린블랫이 쓴 <1417년, 근대의 탄생>(까치)은 '책 사냥꾼' 포조 브라촐리니가 독일의 한 수도원에서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적 서사시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 필사본을 발견해내는 이야기를 흥미롭게 전해줍니다. 포조는 <피렌체 서점 이야기>에서도 주요 등장인물입니다.
🐟로스 킹의 저작들은 국내에서도 여러 권 번역 출간됐습니다. 그중 르네상스를 다룬 책들을 꼽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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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무엇인가' 질문에는 그럴 듯한 대답들이 참 많습니다. "내가 무언가를 안다는 사실을 아는 존재",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공감할 줄 알고 미래를 생각하는 존재" 등등. 그러나 영국의 역사학자 사이먼 재럿은 자신의 책 <백치라 불린 사람들>에서 이와 달리 아주 담백하고 간결한 정의를 내놓습니다. "인간은 인간 부모에게서 태어난 존재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인간 존재를 구별하는 조건으로 삼는다면, 장애 앞에서 우린 쉽사리 인간 존재를 규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은이는 재판 기록과 속어, 유머, 소설과 시, 풍자만화 등 다양한 소재들을 가지고 서구 사회 속 지적장애인의 역사를 톺아봅니다. 특히 19세기 중반 새로운 세계 인식에 따라 지적 장애인들을 시설에 가둔 '대감호' 시대를 그 중심에 놓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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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풍모방 노동조합은 유신의 서슬이 퍼렇던 1970년대에 성공적으로 노조 활동을 펼친, 민주노조 역사에서도 '전설'로 꼽힙니다. 신군부의 집요한 탄압으로 역대 가장 긴 저항과 가장 많은 해고자를 기록한 노조이기도 합니다. <파문>은 이 원풍노조 출신 '글 쓰는 노동자' 장남수 작가가 펴낸 첫 소설집입니다. 작가는 수기 <빼앗긴 일터>(1984)를 쓴 바 있고, 2020년에는 그 이후의 시간까지 포함한 반 세기를 돌아보는 <빼앗긴 일터, 그후>를 펴낸 바 있습니다.
빈농의 딸로 태어나 70년대 산업전선에서 일하다 노조 활동으로 해고된 경험은 그의 소설 작업에서도 핵심입니다. "(민주화 운동 이후까지) 40년 동안 우린 늘 그 자리에서 빌딩 청소하고, 때를 밀고… 모험하는 노동을 해요. 이런 이야기까지 기록이나 에세이로는 절대 못 쓰겠어요." 임인택 책기자에게 전한 작가의 이 말이 새삼 가슴속을 파고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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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은 밟혀도 다시 일어난다>(학민사)는 가장 최근에 나온 원풍모방 노조에 대한 기록으로, 원풍모방 노조 조합원 126명의 생애사를 담은 책입니다. 앞서 나온 책들에선 투쟁을 이끌었던 사람들이 중심이었다면, 장남수 작가도 인터뷰어로 참여한 이 책은 평범한 조합원들의 활동과 삶에 초점을 맞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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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출신 철학자 미셸 옹프레(64)는 아무리 유명하고 권위 있는 인물이라 할지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냉소적인 공격을 퍼부어대는 탓에 '위험한 사상가'로 여겨지곤 합니다. 프로이트, 들뢰즈, 푸코 같은 인물들이 그의 공개적인 공격 대상이 된 바 있습니다.
그가 최근(2019년) 펴낸 <아리스토텔레스의 악어>는 피타고라스, 데리다, 볼테르, 니체 등 각각의 초상화를 통해 서양 철학사를 수놓은 34명 철학자들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책입니다. 이들에 대한 옹프레 자신의 호오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데, 예컨대 <에세>로 프랑스 철학의 어떤 원칙을 세워준 몽테뉴는 매우 따뜻하게 평가되는 반면 푸코, 라캉, 들뢰즈 같은 주로 현대 철학자들에 대한 평가와 대우는 "신랄하다 못해 잔인하기까지" 할 정도로 영 좋지 못합니다. '자유사회주의자' 프루동을 지지하고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데에서 지은이의 사상적 지향점이 어딘지 엿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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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가 한눈에 들어오도록 그려진 그림을 보신 적 있으신가요? 도시와 주거문화를 연구해온 건축학자 손세관은 이런 장대한 그림들을 '도시그림'이라 부릅니다. 그는 <도시의 만화경>에서 열 다섯 장의 도시그림들을 주된 소재로 삼아 동서양 열 다섯 곳 역사 속 도시들로 독자들을 초대합니다.
14세기 시에나에서 출발해 20세기 뉴욕에 이르기까지, 이 도시들에는 나름의 독특한 유전자가 있습니다. 좁은 지역에 많은 주택을 짓기 위해 공간을 공유했던 베네치아, 프라이버시를 위해 구부러진 길들과 건물 내부를 보여주지 않는 빽빽한 주택들로 가득한 이슬람 도시 이스파한, 칼뱅주의적 전통으로 허세나 낭비 없이 대규모 서민 주택을 지은 암스테르담. 모든 도시그림에는 한결같이 그 도시(공동체)를 사랑하고 열망하는 마음, 곧 시민정신이 배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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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이하고, 희귀하고, 폄하된 것들을 찾아
번역가 성귀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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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성귀수가 우리말로 옮긴 책 가운데 베스트셀러를 꼽자면, 모세와 예수, 마호메트를 비판하는 작자미상의 전설적 괴문서 <세 명의 사기꾼>(아르떼), 제목대로 위험하고 극단적 생각을 담고 있는 <힘이 정의다>(영림카디널) 등이 있습니다. 이처럼 그는 괴이하고, 희귀하며, 폄하된 것에 끌립니다. 그는 “읽기 어려운 것, 일반인의 손에 잘 닿지 않는 것,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큰 가치를 지닌 것”을 찾아내어 소개하는 것이 번역가의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아르센 뤼팽' 전집과 '사드 전집' 등의 기획과 번역에 힘쓰는 데에서도 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뚜렷한 지향점을 지닌 번역가가 있다는 것이, 독자에겐 얼마나 다행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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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가 직접 꼽은 책들의 표지. 왼쪽부터 '사드 전집' 2권 <소돔 120일 혹은 방탕주의 학교>(워크룸프레스) <힘이 정의다>(영림카디널) <지혜와 운명>(아르테) <읽고 쓰는 사람의 건강>(유유) 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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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스페인이 좋아서 차린 스페인 전문 책방
스페인책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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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책방은 스페인어 문화권의 문화와 예술을 소개하는 국내 유일의 스페인 전문 책방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스페인, 중남미 관련 책들과 스페인어 원서, 그리고 책방지기의 취향으로 고른 크고 작은 책들을 함께 소개하고 판매합니다. 다양한 문화 행사와 모임을 통해 사람들과 연결되기도 하고요, 2020년 하반기부터는 팟캐스트 ‘스페인책방 라디오: 5층인데 603호’를 진행하면서 스페인과 중남미 이야기, 책 이야기, 책방 소식 등을 전하고 있습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은 건물 5층에 올라 문을 여는 순간 펼쳐지는 화사한 색감의 인테리어와 남산이 시원하게 내다보이는 창밖 풍경도 자랑이지만, 무엇보다 색깔이 분명하다는 것이 스페인책방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곳에 오시는 분들이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품고 있는 밝은 에너지를 느끼면서, ‘이 사람은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그렇다면 내가 좋아하는 건 뭐지?’ 생각해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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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강을 건너는 심경
초조가 진화하면 얼음이 됩니다
표백된 감정이
강 위로 쌓이는 날
약속을
잊은 약속처럼
잃은 사람의 이름처럼
겨울을 이해할 때까지 얼음은 두꺼워집니다
차가움은 모호하고
깨끗함은 위험하니
안에도 바깥이 생겨 비대해진 슬픔
내용 없는 바람이 맥락을 끊습니다
눈은 계속 날리고
발자국은 차오르고
누구도 편애할 수 없는 냉실 속에 있습니다
📖김보람 시집 <이를테면 모르는 사람>(시인동네)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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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반올림(#)책은 어떠셨나요?
좋았던 점, 아쉬웠던 점 등 기탄없이 의견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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