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언제나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듯한 시간의 흐름 위에 서 있는 인간에게, 시작이나 끝 등 어떤 형태로든 시간의 끊김을 상상하는 일은 무척 어렵습니다. 우리는 인위적으로 설정해둔 시간의 단위 위에서만 간신히 시작과 끝을 더듬어 볼 따름입니다. 1년이란 단위의 시작과 끝이 교차하는 요즈음이 딱 그런 시기겠죠. 지나간 한 해의 퇴적물들을 뭉뚱그려 평탄하게 고른 뒤, 그 위에 앞으로 한 해 동안 찾아올 것들을 쌓아올릴 채비를 합니다.
지난해 읽은 <분해의 철학>(사월의책)에서 재밌는 논의를 보았습니다. 지은이는 일본의 언어학자 오노 스스무의 주장을 받아들여, 시간, 때 등을 말하는 일본어 ‘도키’(時·とき)가 “푼다/풀리다”는 뜻의 옛 일본어 ‘도쿠’(とく)에서 온 것이라 추정합니다. 굳게 매여 있던 매듭이 느슨해지며, 서로 단단하게 응고된 결정이 흐물해지며, 비로소 시간이라는 것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시간은 그 무엇과도 상관없이 영원히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무너지고 푸는 것”으로부터 ‘발생’합니다. 한 해가 시작되면 우리는 또다시 마치 영원을 살듯 무언가를 끊임없이 쌓아 올리며 살게 되겠지만, 그 한 해가 저무는 무렵이 되면 그렇게 쌓아올린 것들을 또다시 속절없이 무너뜨리고 풀어내야 할 것입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게 아니라, 끝이 있어야 시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2022년 ‘올해의 책’ 스무 권을 꼽은 데 이어, 이번 주에는 2023년 계묘년 새해를 맞아 여러 출판사들에서 펴낼 책들 가운데 주목할 만한 책들을 꼽아서 소개합니다. 무너지고 다시 쌓이는 야속한 반복 속에서, 우리가 서 있는 대강의 좌표라도 파악할 수 있게 도와줄 수단이 되길 빕니다. 새해에도 님께 좋은 일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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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묘년 새해를 맞아, 출판사 50여곳으로부터 2023년 출간 예정작 목록을 건네받아 살펴봤습니다. 종합/문학/인문학술 분야로 나누어 소개합니다. 올해에도 우리의 머리는 냉철하게, 가슴은 뜨겁게 만들어줄 많은 책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최원형 책기자는, 인류학자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가 종말론과 인류세의 위기의식을 다룬 <세상의 종말>(이음), 남성의 자본 점유와 계급 사회의 재생산을 추적한 사회학자 셀린 베시에르의 <자본의 성별>(21세기북스), 여덟살에 자폐증 진단을 받은 생화학박사 카밀라 팡이 과학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는 과정을 담은 <인간 사용 설명서>(가제, 동아시아) 등을 마음속에 '찜'해두었습니다.
문학과 좀처럼 친하게 지내지 못했는데, 윤흥길 작가의 대작 <문신>(문학동네)의 완간을 계기로 소설에도 빠져보고 싶습니다. 영상물로도 만날 수 있는 M.O.월시의 <빅 도어 프라이즈>, 닐 셔스터먼의 <수확자 3부작> 등도 궁금하네요.
드디어 완간될 이정우 소운서원 원장의 <세계철학사>(길), 한반도 문제를 깊이 고민해온 이삼성 한림대 명예교수의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한길사), 인류학자 필리프 데스콜라의 <자연과 문화를 넘어서>(사월의책) 등 인문학술 분야의 굵직한 책들도, 기회만 된다면 꼭 보고 싶습니다.
님도 이중 '나만의 리스트'를 한번 만들어보시면 어떨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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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테 콜비츠(1867~1945)는 전쟁과 가난, 상실과 결핍에 시달리는 인간의 내면을 형상화한 판화와 조각, 그림으로 유명한 여성 예술가입니다.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거의 모든 그의 작품은 흑백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어떤 이들은 예술보다 이념이 앞선다거나, 혁명에 충실하지 못했다거나 등 서로 상반된 관점에서 그의 세계를 품평하곤 합니다.
2015년작 <케테 콜비츠 평전>은 충실한 자료 조사에 기반해 그의 삶을 핍진하게 복구한 책입니다. 언론인, 작가 부부인 지은이들은 "정해진 모든 분류를 벗어"났기에 평생 이리저리 흔들려야 했던 그의 삶에 주목했습니다. 미술사가 카테리아 크라머가 집필한 1981년작 평전(국내에는 1991년 실천문학사 번역출간)에 이어, 그의 삶과 예술을 가까이 볼 수 있게 해주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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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법학자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는 <한겨레> 연재인 '박홍규 이단아 읽기'에서 케테 콜비츠가 보여준 '새로운 여성상'에 주목한 바 있습니다.
🐟카테리네 크라머의 <케테 콜비츠>(1981)는 <케테 콜비츠 평전> 이전에 그의 삶과 작품세계를 생생하게 보여준 책으로 꼽힙니다. 국내 번역본도 나왔었는데, 지금은 절판된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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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 평전>은 전사이자 혁명가를 자처했던 시인 김남주(1945~1994)의 일생을 비교적 자세하게 좇는 평전입니다. 앞서 강대석, 김삼웅의 평전이 있었지만, 지은이인 시인 김형수는 "대중이 사건의 시간적 연결로 그를 이해하고, 그렇게 묻혀선 안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임인택 책기자는 지은이의 시도를 "'시적 증언'으로 김남주를 복원하려" 했다고 평가합니다. 김남주의 말과 시어에서 찾을 수 있는 '자유', '존엄', 그리고 '좆되어부렀다' 세 가지의 인식이 모두 담긴 그의 시로 '종과 주인'을 새겨보기도 합니다.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종을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목을 베어버리더라/ 바로 그 낫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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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문화사 속에는 물리적으로 시각을 잃으면 마음의 눈을 뜰 수 있는 오랜 클리셰가 존재해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눈멂'에 대해 제대로 알기나 한가요? 오직 비시각장애인의 관점만을 전제로 삼고, 제맘대로 눈멂에 대해 상상해온 결과가 '마음의 눈' 운운하는 얘기들 아닐까요?
시각장애를 지닌 공연예술가, 작가인 리오나 고댕은 <거기 눈을 심어라>에서 호메로스부터 존 밀턴, 헬렌 켈러, 보르헤스, 스티비 원더까지, <리어왕>부터 <걸리버여행기>, <눈먼 자들의 도시>, <듄>, <스타워즈>까지 훑어내리며 눈멂의 고정관념을 깹니다. 눈멂과 눈뜸 사이에 "수많은 얼룩덜룩한 공간"이 있음을 일깨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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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주요 인물이자 민주화운동의 산증인인 함세웅(80) 신부는 2012년 현장 사목에서 은퇴한 뒤 늦공부를 글쓰기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붓글씨 선생인 이동천 박사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글씨에 뼈와 근육이 있고 신경을 통해 생명력이 넘쳐야 합니다."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기도>는 그렇게 글쓰기 공부에 매진한 함 신부가 한국 현대사의 52가지 장면을 휘호로 쓰고, 그 상세한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4·3제주항쟁, 5·16군사반란, 5·18민중항쟁, 6월항쟁…. 울부짖는 글씨가 시대의 증언으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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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노블 작가 김금숙의 첫 책
<아버지의 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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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개인적인 것으로부터 보편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등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해온 그래픽 노블 작가 김금숙은 국내에선 처음으로 '만화계의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하비상을 수상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의 첫 책 <아버지의 노래>는 "머릿속에 있던 영화 한 편을 그대로 옮긴" 것이라 하는데, 당시 만화는 그에게 첫 시도였고 글도 모국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썼습니다. 그래서 "자전적 이야기였어도 거리를 두고 쓸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답니다. 스무 장 정도를 그려 무작정 출판사에 보낸 것이 첫 책으로 이어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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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숙 작가가 첫 책 이후 펴낸 다른 책들. 왼쪽부터 순서대로 풀(2017), 기다림(2020), 개(2021), 시간이 지날수록 빛나는(2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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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과 책방, 이렇게나 훌륭한 조합
데카르트수학책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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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을 열기 전에 가장 자주 듣던 말은 “수학책방이라고? 도대체 누가 그런 책방에 가겠어?”였다. 교과서나 문제집 말고 수학책이라는 게 있었냐며 놀라는 분들도 있었다. 책방과 수학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수학에 그렇게나 관심이 많은 우리나라에 수학책방이 한 군데도 없다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게 아닐까?
(…)
나는 내 수학책을 매개로 친하게 지내던 유튜버 정유숙(‘쑥샘’)과 의기투합했다. 책방 이름은 대수와 기하를 통합한 수학자이자 철학자, 문이과 통합의 상징이면서 수학책과 썩 잘 어울리는 분의 이름을 따서 <데카르트수학책방>으로 정했다. 2022년 11월1일 온·오프라인 수학책방이 열렸다. 그러자 전국에서 독자들이 모여들었다. 뜻밖의 환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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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잠을 잔다
잠 속에서 잠을 잔다 거울이 거울 속 거울 들여다보듯 잠이 잠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잠이 손잡고 걸어가는 꿈의 손에는 종이꽃 한 다발, 생쌀을 씹으며 잠은 잠 속을 걸어간다
바닥 없는 늪을 헤엄쳐 꿈이 꿈 잡아먹는 악몽의 중세를 지나, 구더기가 노래하는 언덕을 지나
잠은 잠 속을 기어간다 기어코
돌아올 일 없는 잠 속에서 잠은 잠을 잔다 돌아올 길 없는 잠 속에서 잠은 잠을 잔다
📖장옥관 시집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문학동네)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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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반올림(#)책은 어떠셨나요?
좋았던 점, 아쉬웠던 점 등 기탄없이 의견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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