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2022년 ‘올해의 책’을 꼽아봅니다. 매주 보내드리는 책들의 목록이 신간들을 검토하는 회의를 거쳐 '그 주의 책'을 꼽는 행위의 결과물이었다면, ‘올해의 책’은 그렇게 소개된 책들 가운데 조금 더 되새김질해야 할 무엇을 찾는 행위의 결과물일 것입니다. 쌓여 있는 책들의 목록을 이리저리 훑어보며 그 ‘무엇’은 과연 무엇인지, 또는 무엇이어야 하는지 곰곰이 따져봅니다. 한국 사회의 세대담론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책으로부터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의 기폭제가 된 고전까지, 반올림(#)책이 꼽은 책들을 하나로 꿸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저는 공동체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안온함을 깨뜨리는 ‘불편함’을 통해 비로소 마주하게 될 공동체. 최근 들춰보게 된 로베르토 에스포지토의 책 <코무니타스>의 영향인 듯합니다. 그는 ‘코무니타스’(communitas)란 “고유의 특성이나 소유물이 아니라 어떤 의무사항이나 빚(‘무누스’·munus)을 공통의 요소로 지녔기 때문에 모인 사람들의 공동체”라 말합니다. 우리는 공동체를 그 구성원들이 특정한 고유성을 공유하는 것으로 상상하는 데 익숙합니다. 실제로 신자유주의 이후 포퓰리즘 시기부터 민족이나 영토, 세대 등 여러 방식으로 고유성을 찾으려는 욕망들이 도드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고유한 것을 공유하는 공동체에서 ‘나’는 그저 ‘더 큰 나’에 머물 뿐입니다. ‘공통된 것’은 되레 내가 더이상 나일 수 없는 결핍의 상황에서, 그러니까 ‘고유한 것’이 사라지는 곳에서 나타납니다. ‘사물’이라 부르든 ‘타자’라 부르든, 전혀 내가 아닌 것을 마주치고… ‘허무’라 부르든 ‘무위’라 부르든, 같은 점이라곤 조금도 없는 그들과 무언가를 공유해야 하는 역설적 상황만이 우리를 공동체로 이끕니다. '올해의 책'으로 꼽은 20권의 책들이, 우리가 안온하게 머물고 있는 고유한 것들을 깨뜨리고 그 너머를 보게 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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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는 빨치산 출신 부모와 자신의 이야기를 쓴 ‘실록’ <빨치산의 딸>로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신춘문예로 등단하기 한참 전이었다. 등단 뒤에도 중단편소설들에서 부모 이야기를 꾸준히 썼던 그가 처음으로 쓴 장편소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장례식 사흘을 배경으로 아버지의 지난 삶과 그가 관계 맺었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뭉클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들려줘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작가는 <한겨레>에 기고한 글에서 이 소설을 두고 “가벼워지니 널리 보이고, 널리 보이니 많은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빨치산’이라는 특수성보다 ‘아버지’라는 보편성이 더 중요한 소설”이라고 자평했다.👉기사보기
그런 세대는 없다
586, 엠제트(MZ), 이대남 등 손쉬운 세대론이 난무하는 시기, 사회학자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그런 세대는 없다>에서 ‘기성세대 대 청년’이라는 세대불평등 담론의 허구성을 작심하고 파헤쳤다. 청년과 기성세대의 현실, 사회경제적 지위의 대물림 등을 깊이 들여다본 지은이는 같은 세대라 해도 결코 동일한 속성을 공유하지 않으며, 핵심 문제는 ‘세대 간 불평등’이 아니라 ‘세대 내 불평등’이라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세대를 가로질러 발생하는 불평등의 실체를 호도하여 세대 사이의 불평등인 양 허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누구인가? “대립의 담론이 지워버린 현실의 삶들”을 직시하기 위한 길을 열어준다.👉기사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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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작가 초롱
올해 ‘단 하나의 소설책’으로 꼽을 만하다. 성명미상의 사람들을 서사 복판에 세운다는 의지의 필명으로, 2018년 문단에 내놓은 첫 단편 ‘하긴’(2019년 젊은작가상)부터 올 상반기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까지 전체 8편을 엮은 이미상 작가의 첫 소설집. 386세대의 허위, 좌절 따위를 자식세대와의 관계를 통해 통렬히 은유하고, 이른바 엠제트(MZ)세대가 중층적 분절적으로 겪는 실존, 윤리의 무게 등을 ‘리드미컬’하게 다뤄낸다. ‘하긴’의 첫 단락엔 “이름이 거하면 인생이 이름에 잡아먹힌다”는 문장이 박혀 있다. 전체 주제를 추리자니 거해졌을 뿐, 작가적 명분이 아닌 이름 없는 자들의 실체적 형상을 이미상은 웃기게, 아프게, 빗대고 내치듯 그린다. 이 소설들이 과연 온전히 국외번역될 수 있을까.👉기사보기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진은영 시인이 10년 만에 내놓은 네번째 시집. “사랑의 윤회를 믿는” 시인은 이전 시집들에서도 줄기차게 사랑을 노래해왔다. 다소 난해할 수도 있는 그의 시들이 그럼에도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는 비결이 바로 거기에 있다 하겠다. 시집 제목에서 보듯, 그는 새 시집에서도 매력적인 사랑의 노래를 들려준다. 또한 이 시집은 2014년 세월호 충격 이후 그가 처음 내놓는 것이어서, 그 참사가 남긴 상흔과 그것을 넘어 앞으로 나아가려는 안간힘 역시 시집에는 역력하다. “스무 살도 못 되게, 너무 조금 곁에 머물러서 미안”(‘그날 이후’)이라 아빠에게 말하는 예은이의 생일시는 많은 독자를 울렸다.👉기사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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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인, 소명에 따르다
‘간첩 깐수’로 세상을 놀래킨 문명사가 정수일이 미수(88살)를 맞아 통일과 문명교류학 정립에 바친 평생을 회고록으로 풀어냈다. 얄팍하고 각박하기만 한 시절, ‘나’보다는 시대와 역사, 민족을 앞세우는 선공후사의 정신이 돋보인다. 신생 중국의 전도유망한 외교관 자리를 박차고 통일 사업에 몸 바치겠다며 ‘환국’을 결단한 일에서부터, 간첩 활동으로 들어간 감옥에서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곳을 연구실 삼아 책을 읽고 원고 집필에 매진한 기개, 출옥 뒤 지구 곳곳을 누비며 실크로드학과 문명교류학의 현장을 확인한 실증 정신, 북과 남 두 부인과 딸들에 얽힌 개인적 회한을 두루 만날 수 있다.👉기사보기
도올 주역 강해
<도올 주역 강해>는 철학자 김용옥 전 고려대 교수가 쓴 <주역> 해설서다. 지은이는 지난 2천여년 동안 동아시아에서 탄생한 주요한 <주역> 해석을 바탕에 깔고서 이 난해한 책을 오늘의 언어로 바꾸어 우리 시대를 이해하는 데 빛을 주는 책으로 빚어낸다. <주역>은 우주 만물과 인간 세계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책이자 그 변화를 점치는 책이다. <주역>에는 깊은 ‘우환의식’이 배어 있다. 세상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그 실존의 한계상황에서 하늘에 뜻을 묻는 것이 점이었다. 사사로움을 넘어선 물음이었기에 역에 대한 해석을 통해 윤리학적‧형이상학적 사유가 자라날 수 있었다.👉기사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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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의 발견
남동신 서울대 교수가 쓴 <원효의 발견>은 우리 역사상 최고의 불교사상가로 꼽히는 원효의 생애와 저술과 사상을 두루 깊숙이 파헤쳐 들여다본 책이다. 지은이는 새로운 시각으로 본 원효상을 과감하고도 면밀하게 그려낸다. 이 책이 공들여 구명하는 것은 원효의 핵심 사상인 ‘일심’과 ‘화쟁’의 본뜻이다. <대승기신론 소‧별기>와 <금강삼매경론> 같은 대표 저술에서 원효는 중관사상에 머무르지 않고 유식사상을 끌어들여 서로 회통시켰다. 이때 회통의 근거가 된 것이 ‘일심’이다. 원효는 7세기 후반 동아시아를 휩쓴 신역‧구역 갈등을 일심 사상으로 극복함으로써 한국 정신사의 화쟁 전통의 첫머리를 장식했다.👉기사보기
깻잎 투쟁기
크고 작은 제조업체는 물론 농업과 어업 같은 1차산업 현장에서도 이주노동자의 존재가 필수적이게 된 지도 벌써 오래다. 2020년 겨울 캄보디아 이주노동자가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숨진 사건은 그런 현실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이 책은 사회학자인 지은이가 참여 관찰 방식으로 기록한 최초의 농업 이주노동자 연구서다. 지은이는 크메르어를 배우고 캄보디아 현장 연구를 거쳐 직접 깻잎 밭에서 일하며 이주노동자들과 ‘사업주’인 농민들을 만났다. 이주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 조건과 인권침해, 농촌의 변화, 고용허가제의 불합리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밥상 위 깻잎 한 장에 이토록 많은 이야기가.👉기사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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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
올해는 전후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규정한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구축된 지 70년 되는 해였다. 샌프란시스코 체제란 전범국 일본이 미국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성립한 체제를 말한다.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서>는 이 조약에 내장된 문제들과 이 체제가 일으킨 문제들을 낱낱이 밝힌다. 조약 체결로 일본은 미국의 핵심 동맹국이 됐고 전쟁범죄자 대다수가 면죄부를 받았다. 역사 문제와 영토 문제를 묻어버림으로써 심대한 후유증을 낳은 것은 더 큰 문제다. 이 책은 한‧중‧일 시민이 힘을 모아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낳은 시대 역행을 저지하고 ‘동아시아 공동체’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기사보기
0원으로 사는 삶
온통 돈으로 굴러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쓰지 않는 삶이 가능할까. 이 책의 지은이는 그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더 매력적이라고 말한다. 시작은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워킹 홀리데이로 떠난 영국에서 해고를 당하고 빈털털이가 된 뒤 고민 끝에 ‘0원 살이’를 결심했다. 유기농 농장에서 일을 하며 자급자족하는 ‘우핑’과 더 엄격한 노동 공동체 등을 거쳐, 런던의 빈 배와 빈 건물에서 지내며 대형 마트의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재고 음식물로 배를 채웠다. 히치하이킹으로 유럽 각국과 인도까지 여행하면서 돈이 아닌 사람에게 의존하는 삶을 깨우친 그는 지금 지리산의 빈집에서 살고 있다.👉기사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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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모른다는 이는 없어도 읽었다는 이는 많지 않은 프랑스의 대표적 고전. 비의지와 의식의 교차로 오랜 기억을 복원하며 작가 스스로의 소명을 ‘간증’해가는 과정이 실로 유장하고 난해하기 때문이다. 1950년대 판본이 국내 소개되어 오다 1987년 프랑스 플레이아드 전집(7편)을 저본 삼아 김희영 한국외대 교수와 민음사가 2012년 ‘스완네 집 쪽으로’(1·2권)를 옮겨 펴낸 후 꼬박 10년에 걸쳐 올해 말 마지막 편 ‘되찾은 시간’(1·2권)까지 모두 13권으로 완역 기획의 대장정을 마쳤다. 김 교수는 독자와의 거리를 줄이기 위해 직역 위주로 “원문의 떨림을 전달하는 데” 애쓰면서 세세한 주석과 각 편마다의 해설로 시대 배경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기사보기
평화의 수호자
마르실리우스는 서양 고대 사상과 근대 사상 사이에 다리를 놓은 중세 후기 정치철학자다. <평화의 수호자>는 마르실리우스 정치사상이 집결된 저작이며 근대 인민주권 사상의 원천이 된 고전이다. 마르실리우스의 근본 관심은 교황과 황제라는 이중권력이 서로 싸우는 상황에서 어떻게 평화를 찾아낼 것인가에 있다. 이 책은 교회 권력을 세속 권력에 복속시키는 방식으로 정치권력을 단일화할 때 평화가 실현될 수 있다는 논리를 편다. 나아가 세속 권력의 단일성을 입증해 가는 과정에서 모든 권력의 토대를 ‘인민’ 또는 ‘시민 전체’에서 찾는다. 이 발상에서 인민주권과 사회계약이라는 근대 정치사상의 원리가 자라났다.👉기사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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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충돌
미국과 중국 사이 이른바 ‘제국의 충돌’을 분석할 때 가장 흔하게 쓰이는 틀은 ‘신냉전’으로, 이는 민주주의 체제와 권위주의 체제 사이 불가피한 이데올로기 대립을 전제로 삼는다. 홍콩 출신 사회학자 훙호펑의 책 <제국의 충돌>은 미·중 갈등의 실체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게 해줄, 더 넓고 깊은 시야를 제공한다. ‘차이메리카’라 불렸던 과거 미·중 공생 시기에도, 오늘날 갈등 상황에도, 언제나 그 핵심에 있는 것은 ‘자본 간 경쟁’이다. 지정학적 충돌이란 현상 너머에 있는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그에 대한 우리의 대응 역시 과녁을 제대로 맞추지 못할 것이다.👉기사보기
분해의 철학
일본 농업사학자 후지하라 다쓰시가 쓴 <분해의 철학>은 ‘여지껏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책’이다. 인간의 입맛대로 규정되지 않는 자연 속에서 ‘분해’란 도대체 무엇인가 묻는 철학을 전개하는데, 인간이 오랫동안 무시하거나 은폐해온 분해를 이 세상에서 가장 근본적인 작용으로 바라봄으로써 오직 생산과 소비에만 몰두해온 근대 문명을 비판한다. 환경이나 생태, 지속가능성 같은 개념에는 자연을 인간의 입맛대로 이상화하려는 태도가 드러나곤 한다. 그러나 분해를 중심에 놓는 사유는, 일말의 인간중심주의마저 털어내고 ‘무정한’ 이 세계를 바로 볼 수 있도록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다.👉기사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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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없는 노동
디지털 기술을 앞세운 플랫폼 자본주의는 인간의 노동이 필요없는 세상이 곧 도래할 듯 군다. 그러나 영국의 대안적 싱크탱크 연구원이 쓴 책 <노동자 없는 노동>은 정작 우리가 우려해야 할 것은 ‘노동 없는 세상’이 아니라 ‘노동자 없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책은 단돈 몇 푼으로 사진 속 개와 고양이를 분간하는 등의 파편화된 작업을 수행하며 알고리즘을 교육시키는 ‘미세노동’의 세계를 탐사한다. 자본은 공식 경제 영역에서 밀려난 잉여인구를 노동자 보호 수단들이 제거된 비공식 경제 영역으로 내몰고, 아예 이를 표준으로 삼고 있다. 이것은 과연 누구의 천국이고, 누구의 지옥인가?👉기사보기
우리의 사이와 차이
당장 보도블록 턱, 당장 지하철 무승차 대응과 다퉈야 하는 한국의 장애 가진 사람에겐 실로 먼 책. 물을 한잔 뜨러 갈 때도 동선, 지점마다 수반되어야 할 자신의 체위, 동작을 매양 계산하고 외고 저자가 그것을 책 세 쪽에 걸쳐 복기할 수 있는 이유는 언어학자라서가 아니다. 휠체어 장애인이기 때문이다. 노르웨이 출신 대학 교수인 얀 그루에가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 갈망하는 자유는 영원불멸의 테제가 아니다. 그는 당장의 감각, 당장의 자유, 당장의 존재이길 바란다. 한국과는 멀어도 결국 당도할 수밖에 없는 얘기. 아름답고 단단한, 심지어 오만한 문장으로 가득하다. 노르웨이 예술학교 교수이기도 한 손화수씨의 번역에 힘입었다.👉기사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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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반격
포퓰리즘 국면과 팬데믹을 거치며 주권, 안전, 보호, 돌봄 같은 가치들이 갈수록 주목받고 있다. 사회학자 파올로 제르바우도는 <거대한 반격>에서 글로벌, 세계화, 외주화 등 ‘외향정치’를 추구했던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동이 포퓰리즘 국면을 겪은 뒤 점차 ‘신국가보호주의’로 향해가고 있는 거대한 흐름을 포착해 제시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신자유주의가 지워버렸던 “정치공동체의 장소적·영토적 성격”의 귀환, 그러니까 국가와 주권·보호·통제 같은 ‘내향정치’의 가치들이다. 이는 좌·우파 모두에게 주어진 조건으로, 좌파는 우파의 ‘유산자 보호’에 맞서 ‘사회 보호’를 추구해야 한다 주장한다.👉기사보기
완경선언
“완경을 둘러싼 침묵과 수치심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팩트와 페미니즘을 장착할 것을 요구한다.” 이런 선언이 요구되기까지 완경은 “폐경”으로 불리었으며 고갈과 상실의 결과였을 뿐이다. 1812년 ‘완경기’라는 용어가 등장했음에도 출산도구로 여성을 취급하는 남성지배적 사고가 견고한 탓인데, 모성사회일지언정 발기부전을 두고 “페니스가 ‘닳디 닳아서 못 쓰게 됐다’”고 했겠는가. 올해도 철학, 인문사회,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 서적이 적지 않았다. 그 가운데 <완경선언>은 몸이 곧 의식이고 언어이며 사회를 구성하는 단위임을 새삼 자각시키고, 동성집단 내에서도 약자가 되는 중년의 여성을 뷰파인더 한가운데 두고 있다는 점에서 올돌하다.👉기사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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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테리아에서 바흐까지, 그리고 다시 박테리아로
과학과 철학을 가로지르며 끊임없이 ‘의식의 문제’를 파고들어왔던 대니얼 데닛이 자신의 50여년 연구를 종합한 결정판. 박테리아처럼 단순한 움직임만 있는 세계에서 어떻게 천재 작곡가 바흐와 같은 인간의 마음이 탄생했을까 묻는다. ‘심신이원론’으로 오랫동안 이 문제를 풀기 위한 길을 가로막아온 ‘데카르트 중력’에서 벗어나, 지은이는 인간이 자연선택의 연쇄 속에서 유전적 본능에 근거하지 않은 행동방식(‘밈’)을 유전해온 궤적에 주목한다. 정보의 축적, 재생산, 전달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가 인간 의식과 문화의 중심에 있는데, 지은이는 이 또한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시스템으로 풀어낸다.👉기사보기
포스트 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 문화 논리
미국 문화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1991년 저작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 문화 논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지식계를 휩쓰는 데 동력 노릇을 한 책이다. 이 책을 통해 포스트모더니즘은 20세기 후반 미국 대중문화를 넘어 현대 자본주의 문화 전반을 설명하는 용어로 올라섰다. 제임슨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발전에 적용한 변증법적 방식을 끌어들여, 포스트모더니즘을 후기자본주의가 낳은 필연적인 문화 양식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진보이자 파국’으로 보는 관점을 제시한다. 그러나 제임슨의 포스트모더니즘론은 ‘백인 남성’의 관점에서 나온 서구중심주의적인 이론이라는 탈식민주의 진영의 공격에 직면했다.👉기사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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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농부로 지낸 지 10년, 흙을 고르고 씨앗을 뿌려 식탁에 올리는 자급자족의 단출한 삶 때문인지, 책방 서가도 자연·동물·여성 등 이와 어울리게 채워졌다. 처음부터 ‘제로웨이스트 책방’을 목표로 해, 손님들도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는 노력에 동참해주고 있다. 전 세계 농부들의 인터뷰를 담은 다큐멘터리(<자연농>)를 바탕으로 만든 책 <불안과 경쟁 없는 이곳에서>(열매하나)의 작가님을 모시고 첫 북토크를 한 날이 떠오른다. 추운 계절, 책방의 첫 단골손님은 비건유부초밥과 된장국을 준비해 오고, 나는 고구마를 굽고, 작가님은 책 사이에 곱게 말려둔 꽃잎과 풀잎을 한 장 한 장 종이에 붙여 엽서를 만들어 선물로 나누어주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오는 긴 여정에도 피곤한 기색 없이 따뜻한 마음들이 모아져 빛났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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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화칼슘 보관함
툭툭 눈송이는 함 위로 떨어지는데, 그렇게 쌓이는 눈, 쌓여가는 눈, 눈을 밟는 고양이의 발자국, 고양이는 지나갔나, 또 다른 고양이가 나아가고 있었나, 그 시간은 흐르고, 문득 염화칼슘 보관함을 여는 네 손이라니, 열 때 조금은 흩날려 내리는 눈, 염화칼슘을 얻은 네 표정, 이후 닫히는 함, 그 후 눈은 다시 쌓이네, 쌓이다가 녹다가 그렇게 눈의 계절은 흘러가고, 날씨는 따뜻해지고 있었는데, 너는 거닐었고, 거기 보이는 염화칼슘 보관함, 햇볕이 내리쬐네, 숱한 손발이 닿았을 테고, 생물의 흔적은 남아 있기도 했을 테지만, 여름이 되어가고 있으니 자국은 찾아보기 어렵고, 함을 열 수 있을까, 놀랍게도 여름이 되어서 네 손이 닿을까 열릴까, 눈을 털듯 하다가 함을 열어보는데, 안에는 무엇이 있나요, 열어보니 그것이 있군, 그것이야, 그것을 뒤로한 채 너는 골목을 거니는데, 집으로 돌아갈 때는 여러 마리의 고양이를 볼 수 있었고……
📖안태운, <시 보다 2022>(문학과지성사)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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