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디지털 문명에서는 뭐든 늘 새것처럼 반짝이며 그럴듯해 보입니다. 0과 1만으로 이뤄진 디지털 제품들은 먼지가 앉지도 때가 타지도 않으며, 마치 영생이라도 할 듯 늘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합니다. 색이 바래지거나 낡아 바스러지지 않는 디지털 사진, 테이프처럼 늘어날 일 없이 깔끔한 디지털 음원, 시간이 지나도 열화 현상 없는 디지털 영상…. 클라우드 서비스 덕에, 그것을 담아내는 낡은 기기들이 여러 차례 교체되는 과정에도 데이터로 이뤄진 디지털 제품 그 자체는 정말로 ‘구름 위’에서 내려온 듯 언제나 생생합니다.
그러나 때로 이 디지털 문명이란 것도 어쩌면 ‘그럭저럭, 대충’ 유지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때도 있습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나로 착각하여 제시된 사진 추천 등 신뢰하기엔 미심쩍은 알고리즘, 국외를 기반으로 한 디지털 서비스의 누리집이나 애플리케이션에 간혹 띄워지는 조악한 번역의 한국어 메뉴, 그 누구도 원인을 결코 알 수 없을 접속 지연이나 오류, 나도 모르게 망실되고 마는 하드디스크 속 자료들…. 마치 이 세상 모든 것에 간여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어쩐지 역부족인 모습 같달까요.
끝없이 만들어내기 위한 목적으로 되레 적당히 쓰고 버려지는 것들만 만드는 소비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은 책 <디컨슈머>를 읽다가 문득 든 생각입니다. 디지털이든 아날로그든, 우리 주변이 단시간에 그럭저럭 쓸 만한 것들로만 가득 채워지고 있다면, 궁극적으로 그건 거기에 드는 인건비를 저렴하게 유지하기 위한 욕망에서 비롯할 겁니다.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바꿀 수 있을지, 새삼 다시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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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환경'이란 딱지가 붙은 제품을 사는 정도로는 탄소 배출을 줄일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소비 자체를 줄여야 배출량이 줄어들까말까 한 것이 냉혹한 현실입니다. 소비를 줄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과연 우린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요?
<디컨슈머>는 '전세계가 쇼핑을 25% 줄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사고 실험을 제안하는 책입니다. 억지로 소비를 줄여야 했던 대침체의 흔적, 파타고니아 같은 기업의 마케팅, 방글라데시 의류산업단지의 현실 등을 두루 톺아보면서, 지은이는 일단 긍정적인 메시지를 주는 듯합니다. 힘은 들겠지만 소비 자체를 위한 소비를 줄이고 비영리적인 삶을 확대해나가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또 실제로 소비주의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고. 다만 이를 위해서는 공동체 전체가 움직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개인이 실천하고말고 차원이 아니라 구조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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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생태주의 노선 가운데에서도 지은이의 입장은 성장(growth) 대신 번영(prosperity)을 추구해야 한다는 쪽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캐나다 경제의 다양한 시나리오를 제시했던 피터 빅터의 연구, 로버트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GDP 비판 등 '성장 없는 번영' 논의에서 자주 언급되는 사례들도 담고 있습니다. 함께 읽으면 좋을 탈성장 관련 책들을 몇 권 더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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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두구(nutmeg)를 아십니까? 열매 속 흑갈색 씨앗을 갈면 오묘한 향이 나서, 대항해시대 때 서양인들이 가장 탐냈던 향신료입니다.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육두구가 생산됐던 인도네시아 반다제도는 이것 때문에 피에 물든 처절한 역사를 겪어야 했습니다. 육두구를 독점하기 위해 네덜란드 군대가 1621년 섬 전역의 마을과 정착촌을 불사르고 반다인들을 노예로 삼았던 일입니다.
기후위기를 사유하는 인도 출신 작가 아미타브 고시는 이 사건으로부터 출발하는 새 책 <육두구의 저주>를 통해 오늘날의 기후위기가 서구 제국주의에서 비롯했음을 뚜렷하게 밝힙니다. 오로지 이윤을 내기 위해 인간을 몰아내고 땅을 바꿔놓은 제국주의의 '테라포밍'이 오늘날 전지구적 재앙의 가장 근원적인 뿌리라는 것입니다. 지은이는 지구를 수동적인 기계로 바라보는 제국주의의 관점에서 벗어나, 살아있는 주체로 바라보는 '생기론적 관점'을 해법으로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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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에 중국에서 태어난 여성 조선족 작가가 민족의 고전 <춘향전>을 다시 쓴다면, 과연 어떤 작품이 나올까요? 중국어로 글을 쓰는 조선족 작가 진런순(金仁順)의 2012년작 <춘향>이 바로 그 책인데, "익숙하면서도 낯선 분위기"(최재봉 책기자)를 풍깁니다.
주인공인 춘향과 몽룡, 악역인 변학도 등은 원전과 크게 변화가 없는데, 춘향의 어머니 월매는 '향 부인'이 되면서 원전에서 크게 벗어납니다. "출중한 외모와 도도한 성격, 주체적 세계관을 지닌 인물"로서 딸에게 "여자로서 잘 살고 싶거든 오직 스스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조언하는 모습에서 페미니스트의 풍모가 드러납니다. 그의 딸 춘향은 어떻게요? 약 짓는 능력이 탁월하여 풀과 꽃을 식솔처럼 챙겨온 그에게선 생태주의자의 면모가 비치죠. 이들이 만들어내는 춘향 이야기의 결말은 또 어떻게 다를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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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과학사 연구자 야마모토 요시타카(81)는 오랫동안 학원 물리강사로 재직하며 계속해온 연구와 집필로 '거장'으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대표작 <과학의 탄생>, <16세기 문화혁명>은 국내에도 번역 출간되어 있습니다. 3권짜리 대작 <과학혁명과 세계관의 전환>은 그가 해온 근대 과학사 연구의 완결편에 해당합니다. 2019년 1권이 나온 데 이어 이번에 2권이 나왔습니다.
지은이의 연구에는 '왜 유럽에서 근대 과학이 탄생했는가' 하는 질문이 깔려 있는데, 이 시리즈는 17세기 과학혁명을 다룬 <과학의 탄생>, 이를 가능하게 한 16세기의 지각변동을 다룬 <16세기 문화혁명>을 보완하고 확장하는 저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명섭 책기자는 <과학의 탄생>부터 <과학혁명과 세계관의 전환>로 이어지는 지은이의 전반적인 탐구 역정 자체를 짚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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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는 1960년대 일본 전공투 공동의장으로서 격렬한 사회투쟁을 벌였던 인물로 유명합니다. <나의 60년대>라는 책에서 그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함께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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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페미니스트 비건 지향 무당'. 3년 전 무당이 된 90년생 작가 홍칼리가 스스로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신령님이 보고 계셔>로 자신의 '무당 일기'를 썼던 그가, 이번에는 다른 무당 6명을 인터뷰한 이야기를 담은 책 <무당을 만나러 갑니다>를 내놨습니다. 퀴어 페미니스트 비건 지향 무당이 있는데, 시각장애가 있는 무당이, 성소수자 손님들을 많이 만나는 트랜스젠더 무당이, 통일을 기원하며 대동굿판을 여는 무당이 없을 리 없습니다.
대화는 무당을 마냥 신비화하기보다는, 생활인 또는 직업인의 관점에서 무당에 대한 역사적, 사회적 인식과 현실, 사사로운 이야기들까지 폭넓게 가로지릅니다. 부제에 담겨듯, 무당은 타인의 목소리를 듣고 "함께 우는 존재"임이 도드라집니다. '무속인 정의연대 굿판' 명의로 책 말미에 실은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성명서'도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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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번역가이자 작가였던 고 이윤기(1947~2010) 선생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두고, 자신은 감수를 맡고 번역은 딸이 하는 걸로 출판사와 계약을 해버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아버지에 의해 번역계에 입문'당한' 번역가 이다희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아버지가 딱 한 번 개설한 번역대학원의 유일한 수강생"이었다고. 아버지가 첫 번째 번역스승이었다면, 흑인 여성으로 유일하게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토니 모리슨은 그에게 '능동적인 번역가'가 되길 결심히가로 이끈, 두 번째 번역스승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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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를 운영하시는 분들 중에서 직접 만들어 파는 음식이 지겨워서 잘 먹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지만, 반전 없이 저는 초콜릿을 좋아합니다. 책방지기 중에서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지만, 여지없이 책도 무척 좋아합니다. 둘 다 진심으로 좋아해서 ‘초콜릿책방’이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둘 사이에 공통점이 많습니다. 마냥 달콤하지도 그저 씁쓸하지만도 않은 특성도 그렇고, 매우 취향을 탄다는 점도 그렇죠. 게다가 둘은 굉장히 잘 어울리는 조합이기도 합니다. 독서를 할 때 핫초콜릿을 한잔 마시면 책의 내용이 더 농밀해지는 것 같은 마법 같은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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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자세
집에 왔고 집이 너무 깨끗하여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맙다고 그러자 사랑하는 사람이 대답했다 내가 치운 거 아닌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연하지 너무 잘 알아 너가 안 어지른 게 기적 같아서 하는 말이야
어떤 일이 누군가에게 굉장하다는 걸 잊지 말자
📖이우성 시집 <내가 이유인 것 같아서>(문학과지성사)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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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반올림(#)책은 어떠셨나요?
좋았던 점, 아쉬웠던 점 등 기탄없이 의견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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