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어린이였던 시절, 청소년이었던 시절에 어떤 책들을 주로 읽었는지 기억하시나요? 분명한 인과관계를 설명해낼 순 없지만, 그 책들이 지금의 님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긴 어려울 겁니다. 책은 누구에게나 소중하지만,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는 특별히 더 소중합니다. 이미 다양한 경험을 거쳐온 성인과 달리, 어린이 청소년에게 세상을 경험하게 해주는 창문으로서 책의 의미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깊습니다. 디지털 중심의 다양한 문화 경험들과의 경쟁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오늘날 출판 문화에서, 이제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책은 최후의 보루로 꼽힙니다. 아이들마저 책을 읽지 않으면 우리의 책 문화는 정말로 고사할지 모릅니다.
<한겨레> 책지성팀은 최근 ' 어린이문학 100년, 쓸모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기획( 👉기사보기)을 시작했습니다. 우크라이나, 미국, 스웨덴 등에서 어린이문학의 의미와 현실을 짚는 기획입니다. 전쟁과 같이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위기의 상황 속에서도 아이들에겐 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읽을 그 책들에는, 그들을 온전한 인격체로 존중하는 태도와 함께 우리 사회가 성취해온 소중한 가치들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네 차례에 걸쳐 펼쳐질 아이들이 읽는 책에 대한 이야기가, 우리 사회 전체에서 책의 쓸모란 과연 무엇인지 톺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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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때 중국 옌볜에서 태어나 중국 첫 국비유학생으로 뽑히고 외교관이 된 청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돌연 북한으로 갑니다. 탄탄대로를 버리고 조국의 미래를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한 겁니다. 그의 이름은 정수일, 문명교류학의 대가로 꼽히는 학자죠. 우리에겐 '무함마드 깐수'란 이름의 간첩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대남 공작'을 위해 아랍인 학자 신분으로 위장해 남한에 들어왔다가 체포되어 옥살이를 한 일 때문이죠.
5년 복역 뒤 정수일은 세계 곳곳을 답사하며 실크로드학, 문명교류학을 심화시키는 학자의 길에 매진해왔습니다. <시대인, 소명에 따르다>는 올해 미수를 맞은 그가 펴낸 회고록입니다. 최재봉 책기자가 꼽았듯, "진정한 민족주의자는 진정한 국제주의자이고, 참된 국제주의자는 참된 민족주의자"라는 그의 말이 파란만장한 그의 삶을 압축해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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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일은 <한겨레>가 기획한 40여일간의 아시아 횡단 실크로드 답사(2005년 7~8월)를 함께하고 그 내용을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이란 제목으로 연재한 바 있습니다. 서울에서 사마르칸트, 팔미라 등을 거쳐 이스탄불에 이르는 문명교류의 대여정을 만나보세요.
🐟중국에서 북한으로, 또 북한에서 남한으로, 정수일이 두 차례나 인생의 방향을 크게 틀었던 것은 '민족'에 대한 그의 생각에서 비롯했습니다. 정수일은 2020년 민족 문제와 통일 담론을 다룬 책 <민족론과 통일담론>을 써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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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인류학의 인기에 힘입어 사랑과 같은 인간의 감정도 과학으로 설명하려는 책들이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책들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사랑을 규정하고 설명하는 데 주력하는데, <과학이 사랑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은 조금 다릅니다. 과학적 설명이긴 하나, 사랑에 대한 규정을 좁혀가는 대신 되레 그것이 다양하게 펼쳐지는 스펙트럼에 주력합니다.
친밀하고 장기적인 인간관계, 무엇보다 부성애 연구의 전문가로 꼽히는 지은이 애나 마친이 펼쳐보이는 스펙트럼은 친구 사이의 우정, 반려동물 같은 다른 종과의 사랑, 신에 대한 사랑, 유명인사에 대한 사랑 등 다채롭습니다. 그리고 그 스펙트럼의 중심에는 "사랑은 생존"이라는 명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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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나 마친의 연구에는 같은 학교(옥스퍼드대) 동료인 로빈 던바의 영향이 배어 있습니다. 던바는 한 인간 개체가 안정적으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 수의 최대치(150명)를 연구한 바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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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을 아시나요? 그 홍콩, 혹시 우리가 알던 홍콩인가요? 꼬박 3년의 팬데믹과 국가갈등, 세대갈등 따위로 벌어진 '나'와 '너'의 틈을 아시아권 9명의 소설가가 각기 탐찰하여 자신의 언어로 인화했습니다. 한중일 공동창작은 있어도, 홍콩, 베트남, 태국, 티베트, 싱가포르의 작가까지 참여한 범아시안 앤솔러지는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제목은 <절연>(絶緣).
임인책 책기자는, 구성의 탓도 있겠지만, 중국이 드리운 깊은 그림자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고 짚었습니다. 홍콩의 작가 홍라이추의 소설 '비밀경찰'은 그중 눅눅하고, 은밀하고, 단호하게 숨 막히는 홍콩을 우리에게 전해옵니다. 우리는 안전한가요, 우리의 틈은 적당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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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키메데스와 우리>는 니클라스 루만(1927~1998)이 학자‧언론인 10명과 나눈 대담을 모은 책입니다. 루만은 '체계 이론'으로 난공불락의 사회학적 '이념 요새'를 구축했다고도 말해지는 사회학자죠. 다양한 주제를 놓고 비교적 자유롭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대담집이기에, 루만의 세계를 조금 더 자세히 파악하는 데 길잡이를 해줄 만한 책입니다.
고명섭 책기자가 조명한, '지식인'에 대한 루만의 생각이 대표적입니다. 총체적인 세계상을 품고 사회 변혁에 나서는 지식인상에 조금도 관심이 없는 루만은, "서로 다른 것끼리 비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을 지식인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러한 지식인이 갖춰야 할 지성의 핵심을 '시적 상상력'에서 찾습니다. '건조한 정신'이 얼마나 풍부한 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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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려한 글쓰기로 환경, 인권, 페미니즘 등을 말해온 리베카 솔닛의 새 책이 나왔습니다. <오웰의 장미>라는 제목대로, 솔닛은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이 정원을 가꾸고 장미를 심었다는 사실로부터 이번 책의 여정을 출발합니다. 책의 핵심 주제는 치열한 글쓰기로 세상에 맞섰던 오웰이기도, 또 그가 가꾸었던 장미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빵과 장미'라는 구호가 보여주듯 장미는 인간에게는 앙상한 생존뿐 아니라 다른 것들이 필요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책은 "오웰이 소중히 여기고 욕망했던 것, 욕망 그 자체와 즐거움과 기쁨에 대한 긍정적 평가, 그리고 그것들이야말로 전체주의 국가와 영혼을 파괴하는 그 침식력에 반대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열어줍니다. 솔닛이 미국 서부를 탐사하고 쓴 1994년작 <야만의 꿈들>도 함께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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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작가 정지아의 첫 책, <빨치산의 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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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이었던 아버지의 장례를 배경으로 삼은 정지아 작가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장안의 화제입니다. 정지아 작가는 빨치산의 딸로 살아온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빨치산의 딸>을 자신의 첫 책으로 써낸 바 있습니다. 첫 책을 쓰게 된 계기가 재밌습니다. 빨치산 이야기를 소설로 써보고자 작가의 아버지를 찾았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아버지는 "내 딸이 쓸 거요"라며 거절했다지요. 그런데 송기원 작가가 그 얘기를 듣고 "그럼 지금 쓰게 하지요. 빨치산의 딸, 제목도 좋네" 하며 작가에게 책을 쓰도록 했다고 합니다. 작가 스스로는 <빨치산의 딸>은 소설이 아니라, 단 한 줄의 거짓도 없이 역사적 기록을 담은 '실록'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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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 작가가 첫 책 이후 펴낸 다른 책들. 왼쪽부터 순서대로 행복(2004), 봄빛(2008), 숲의 대화(2013), 아버지의 해방일지(2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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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일서가’는 아름다울 가(佳), 날 일(日) 자를 쓰는 안동 가일마을에 자리잡은 한옥책방이다. 2019년 가을, 마을의 서쪽 정산 아래 위치한 안동시문화유산 제25호 ‘노동재사’ 건물을 다듬어 책방을 마련했다. 250여년 전 이곳은 평생 지행(知行)을 추구했던 학자 병곡 권구 선생을 기리며 위패를 모시던 곳이었고, 100년 전에는 누구나 함께 잘 살 수 있는 유토피아를 그리고 자주독립을 꿈꿨던 독립운동가 막난 권오설 선생이 설립한 ‘원흥학술강습소’의 공간이기도 했다. 한국전쟁 직후에는 마을 아이들의 교실로 사용되기도 했다 하니, 이곳에 켜켜이 쌓인 시간의 행적들은 책방에 담고자 한 모든 의지들을 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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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
바지를 펼쳐 놓는다
펼쳐 둘 것이 필요하다 바지여서 펼쳐 둔 것이 아니고
펼쳐 둘 것이 필요해서 바지를 펼쳐 둔다 바지가 아닌 것이 없어서 바지를 펼쳐 둔다
펼쳐 둘 것이 필요하다 무엇이든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많으면 많을수록
펼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어도 펼칠 수가 있다 펼쳐 놓으면 나는 펼친 것과 같아지고
나는 그것들과 눕는다
나는 그것들과 눕는다 나는 바지가 아닌 것들과 잠든다
나는 잠에 들 때 비로소 우연의 일치에서 벗어난다
📖배시은 시집 <소공포>(민음사)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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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반올림(#)책은 어떠셨나요?
좋았던 점, 아쉬웠던 점 등 기탄없이 의견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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