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1980년대 미국의 텔레마케팅 업체 다이얼아메리카는 재택 연구원(home researcher)들을 고용해 전화번호를 정확히 확인하는 업무를 맡기고, 이들에게 카드로 작성된 일감을 보냈습니다. 레이먼드 도노반 미국 노동부장관은 1985년 ‘공정근로기준법’(FLSA)에 의거해 다이얼아메리카가 이들에게 최저임금을 주지 않았다며 소송을 제기합니다. 연방법원은 재택 연구원들이 스스로 손익을 감수하는 ‘독립계약자’가 아니라, 다이얼아메리카의 ‘직원’이라 판단했습니다. 다이얼아메리카의 사업에 그들의 업무가 필수적이며, 그들과 다이얼아메리카 사이 업무 관계에 상대적인 영속성이 있다는 것 등을 근거로 들었습니다.
오늘날 플랫폼 자본주의 시대를 선도하고 있는 정보통신(IT) 기업체들은 일자리가 아니라 이를 잘게 쪼개어 수없이 많은 초소형·초단기 일감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일자리를 쪼개어 일감들로 둔갑시키는 근본적인 구조 자체는 다이얼아메리카 때와 별 달라진 게 없어 보입니다. ‘인형 눈알 붙이기’가 이젠 디지털 버전으로 이뤄지고 있는 형국이라고나 할까요? 그렇지만 과연 지금의 법원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진 ‘긱 노동자’들과 ‘미세노동자’들이 저 공룡 기업들의 ‘직원’이라는 과감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지, 의문스럽기만 합니다.
자본은 노동의 몫을 줄이고 그 대신 자본의 몫을 늘리려는 목적만을 위해 끊임없이, 지칠 줄 모르고 우리의 상식을 침식해 들어옵니다. <경제학자의 시대>(부키)는 '시장을 신으로 섬기라'는 가르침을 앞세운 경제학자들이 과거에 상식으로 여겨졌던 일들을 불도저처럼 밀어내고 자본에게 유리한 것들을 새로운 상식으로 만들어낸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이 같은 자본의 '자기실현적' 주술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그보다 더욱 강력한 상상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상상력의 원천은, 언제나 책 속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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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후변화나 코로나19가 거대한 음모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죠. 이런 사람들을 통틀어서 흔히 '과학 부정론자'라고 부릅니다. <포스트트루스>를 통해 과학 부정론이 보여주는 '탈진실' 현상을 분석한 바 있는 철학자 리 매킨타이어는 정작 자신이 과학 부정론자들과 대화해본 경험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평평한 지구 국제학회' 행사를 찾아가는 등 이들과의 대화에 나섭니다.
기후변화를 부정할 것 같은 위치에 있는 석탄산업 종사자, 지엠오(GMO)가 위험하다 생각하는 진보 성향 친구 등과도 토론을 벌여, 그 내용을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과 즐겁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법>이란 책으로 펴냈습니다. 지은이와의 대화 이후 자신의 믿음을 바꾼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답니다. 다만, 최윤아 책기자는 이런 시도로부터 '과학 부정론'을 알아보고 대처하는 힌트를 얻을 수 있다고도 짚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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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트루스>(2019)는 리 매킨타이어의 전작이자 출세작입니다. 저자는 탈진실 시대를 "진실이 개인의 정치적 입장에 종속되는" 현상으로 정의하면서, 이러한 흐름이 등장한 배경으로 "과학 부인주의"를 꼽습니다.
🐟<전문가와 강적들>(2017)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과 즐겁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법>이 자주 인용한 책 중 하나입니다. 과학 부정론자가 자주 이용하는 수사 중 하나가 바로 '가짜 전문가 동원'인데요, 속된 말로 '사짜'들이 '진짜'를 큰 목소리로 자처하며 공론장을 차지하고 있는 현상을 지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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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과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세계가 도래하면, 자동화 때문에 노동이 사라질 거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그러나 <노동자 없는 노동>은 이런 고정관념에 일격을 가합니다. 검색 엔진, 앱, 스마트 기기 배후에서 인간은 여전히 수많은 데이터에 라벨을 지정하는 등 '미세노동'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노동이 없다면 자율주행차나 무인 드론 등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과거에는 일자리로 묶였던 일들을 조각조각 파편화시켰기 때문에 오늘날 일자리를 얻지 못한 '잉여 인구'들이 실업보다도 못한 '하등 취업'으로 이런 일들을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래가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라면, 그 이유는 자동화가 아니라 노동을 '비공식화'하는 현실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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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주는 책으로 <자동화와 노동의 미래>를 함께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일자리는 자동화 때문이 아니라 성장 둔화와 과잉 생산 때문에 줄어들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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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금희는 크리스마스를 데뷔 13년 만에 처음 선보이는 연작소설의 배경으로 삼았습니다. <크리스마스 타일>이란 제목에서, 이 소설집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이야기들을 타일처럼 하나로 포착하고 있을 것이라 짐작케 합니다. 임인택 책기자의 표현대로 그것이 "공연히와 우연히 사이 어디께의 인과"에 따르는 작업이라면, 그 배경은 크리스마스가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합니다.
작가는 임인택 책기자와 한 통화에서 "성탄절과 연말 겨울은 정신적 상업적 그러니까 성(聖)과 속(俗) 양편에서 환영받고 죽음, 소멸과도 가까운 시기로 그 교차로에서 삶을 돌아볼 수밖에 없는 그러면서 그 작은 일상을 초월하는 순간이 얼마나 가치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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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라캉(1901~1981)은 프로이트와는 다른 모습의 정신분석학을 세운 인물입니다. 라캉에게는 자신의 가르침을 잘 다듬어 널리 퍼뜨린 '사도'가 있었는데, 바로 라캉의 수제자이자 사위인 자크 알랭 밀레(78)입니다. 프랑스 정신분석가 니콜라 플루리가 쓴 <상식을 넘어선 현실계>는 밀레의 삶과 사상을 간추려 소개하는 책입니다.
밀레를 들여다보는 것은 단지 라캉을 반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밀레의 작업을 통해 선명해진 라캉 '최후기' 이론을 포착할 수 있게 해줍니다. 말년의 라캉은 '무의식은 언어와 같은 구조로 이뤄져 있다'는 구조주의 시기의 자신과 대항할 정도로 '반라캉적'입니다. "어떤 일반적인 동일성으로 자신을 해소하지 않고 자신의 독특한 존재 자체를 긍정하는 주체"(고명섭 책기자)에 대한 모색이 거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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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갑내기 여성 소설가 두 명이 거의 같은 시기에 에세이를 펴냈습니다. 신경숙 작가의 <요가 다녀왔습니다>와 차현숙 작가의 <나는 너무 오래 따뜻하지 않았다>입니다. 15년 동안 요가가 "소설쓰기 외에 가장 오래 해온 일"이라는 신경숙은 요가가 "사람과 사물에 대해 친절하고 다정한 태도를 지니게 해주었다" 합니다.
35년 동안 우울증을 안고 살아온 차현숙은 몇 번의 자살 시도와 병동 입원, 이혼, 경제적 어려움 등 우울증과 사투를 벌였던 처절한 과정을 용감하게 드러냈습니다. 요가와 우울증. 두 책을 함께 묶어 살펴본 최재봉 책기자는 이 책들이 모두 '회복'과 관계된다고 짚었습니다. "작가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 6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피로와 상처로 얼룩진 심신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두 책은 따로 또 같이 답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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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한 가정집. 아빠와 엄마가 모두 집을 비운 가운데 첫째는 "배가 고프다"는 동생 네 명의 성화에 난감할 따름입니다. 집에는 먹을 것도, 돈 한푼도 없었으니까요. 일단 물만 부은 솥을 불에 올려놓고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보려 하는데… 과연 첫째의 시도는 통했을까요? <우리 가족 최고의 식사!>(샘터)라는 그림책 제목으로부터, 그날의 식사가 바로 이 가족에게 최고의 식사였다는 것을 짐작하실 수 있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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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지기 놀러가면 손님이 책을 파는 요상한 곳
책방, 국자와주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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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은 한 사람도 안 오는 날이 있고, 어떤 날은 좁은 책방이 터져라 꽉 차기도 한다. 내가 본 다른 구멍가게 할매들은 손님이 안 와도 졸면서라도 가게를 지키고 앉아 계셨다. 하지만 나는 그냥 문을 열어둔 채 온 동네를, 산과 들을 돌아다닌다, 처음 온 사람들은 그래도 되는 거냐며,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한다. 익숙해진 사람들은 이제 안다. 이곳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책방이라는 것을.
(…)
그래서 손님들도 하나같이 요상하다. 손님들은 주인이 없어도 그냥 그런 줄 알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 먼저 온 사람이 나중에 온 사람들에게 책도 팔고 또 졸리면 책방 마루에 누워 잠도 잔다. 북콘서트를 하러 왔던 어느 작가는 국자와주걱에 빠져 이웃집으로 이사를 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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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재래시장 안의
공중화장실 수도에서 쏟아지는 물이
아, 따뜻하다
온수 시설도 안 돼 있는데
찬바람이 몰아쳐
날이 확 추워졌는데
물은 미처
차가워질 시간이 없었다
얼어붙은 내 몸
얼어붙은 내 맘
눈물은 뜨겁다
📖황인숙 시집 <내 삶의 예쁜 종아리>(문학과지성사)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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