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모든 걸 남김없이 보여주는 것이 이 시대에 팽배한 욕망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디지털 문명의 빛나는 성취 덕택에 지구상 모든 것이 연결되어 인터넷에 중계됩니다. 관심이 ‘코인’이 되는 구조 아래에서 이제 ‘보이는 것’은 수동적으로 당하는 일이 아니라 능동적인 자기 실현이 됩니다. 더 나아가 그것을 남에게 요구하는 것조차 자연스럽습니다. 공인이 아닌 사람일지라도 스캔들을 일으켜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면 그 일거수일투족이 곧 낱낱이 까발려집니다.
다른 한편 ‘보이지 않는 것’은 여전히 권력입니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글라우콘은 자신을 보이지 않게 만들 ‘기게스의 반지’를 낄 수 있다면 그게 누구든 악행을 저지를 것이라 주장했죠. 정치든 경제든 문화든, 권력을 가진 자들은 평범한 사람은 볼 수 없는 곳에 서서 다른 사람들의 삶을 제멋대로 주무릅니다. 영국 작가 필립 볼은 이렇게 말했답니다. “당신이 보이지 않을 수 있다면 무엇을 할까? 권력, 재산 혹은 성(性)과 관련된 일일 가능성이 많다. 기회가 된다면 아마도 셋 모두.” 이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악행이야말로 ‘모든 걸 남김없이 보여달라’는 대중의 성마른 요구를 낳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다른 어떤 이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은 차별입니다. 여러 소수자들은 고통과 불안 등 자신이 감내하는 실존적인 어려움을 쉽사리 드러내지 못하거나, 설사 드러낸다 하더라도 주목받지 못합니다. 이 사회가 강제하는 통념의 색안경으론 그들의 존재를 포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을 보지 않는, 또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지난주 뉴스레터에서 <상나라 정벌>을 소개하며 "문왕의 동생 주공 단"이라고 썼는데, 주공 단은 문왕의 아들이고 무왕의 동생입니다. 구독자분께서 지적해주신 덕에 뒤늦게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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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출신 한국학자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의 한국 사회에 대한 분석은 날카롭고 깊이가 있습니다.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그는 수많은 저작들을 쏟아냈는데요. 한국어로 쓴 54번쨰 책 <전쟁 이후의 세계>가 최근 나왔습니다. 이 책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국제 사회의 지형도를 그려보고, 강대국 틈바구니에 낀 한국이 새롭게 재편되는 국제 정세 속에서 한반도 평화를 위해 어떤 전략을 취하면 좋을지에 대해 논합니다. 한국으로 귀화한 박 교수는 한국 역사는 물론 한국을 둘러싼 국제 정세 등에도 밝은 눈을 가졌습니다. 한국인이라는 내부인이지만 외부인의 시각까지 겸비한 그의 글은 한국의 상황을 보다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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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교수는 이제 미국의 패권은 쇠락하고 있고, 다중 패권 시대가 오고 있다고 말합니다. 다중 패권 시대는 푸틴 정권이 이끄는 러시아가 바라는 바이기도 합니다. 국가주의, 군사주의, 교권주의, 팽창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푸틴 정권은 미국 패권을 약화시키기 위해 움직이고 있고, 우크라이나 전쟁의 목표 중 하나도 국제 무대에서 러시아의 영향력 강화라고 책을 설명합니다. 러시아가 어떤 경로를 거쳐 현재 사회가 됐고, 이웃 나라를 침략하는데도 러시아에서 반전 시위나 정권 저항 운동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는 이유도 분석합니다. 복잡한 세계 지형 속에서 ‘한반도 평화’를 유지하려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어떻게 해야할 지, 또 이를 위해 시민들이 무엇을 이해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깨닫게 해주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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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국제정세는 서구 열강들의 전지구에서 잇딴 파열음을 만들던 19세기 말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한반도 역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등을 거치며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어버리고 말았죠. 전성원 <황해문화> 편집장이 러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까지 일본의 전쟁을 세계사적 시각으로 조망하는 책 <러일전쟁의 세기>(소화)를 소개합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원인과 의미, 파장을 놓고 국내 학자들 사이에서도 서로 다른 관점으로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해영 한신대 교수와 백승욱 중앙대 교수의 시각을 서로 비교해보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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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는 흔히 시장 원리의 전면적 지배와 동일시됩니다. 국가의 개입은 시장의 자율성과 힘을 위축시키는 것으로 이해되죠. 그런데 <내전, 대중 혐오, 법치>는 그것이 순진한 오해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시장과 국가는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며, 신자유주의는 오히려 국가의 힘을 등에 업고 시장 원리를 사회 전 부문에 관철시킨다는 것이죠. 프랑스어 원제가 ‘내전이라는 선택’인 이 책에서 지은이들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를 필두로 한 신자유주의의 초기 주창자들이 단지 경제 이론의 정립에 그치지 않고 자신들의 경제 이념을 정치적으로 구현하는 데에 힘을 쏟았음을 들춰냅니다. “연합한 과두지배자들이 국민 일부의 적극적 지지에 힘입어 다른 국민 일부를 상대로 벌이는” 내전은 법치를 가장한 폭력으로 자신의 뜻을 강제하며, 권력의 주체여야 할 인민대중에 대한 혐오와 멸시가 그 바탕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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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우파 신자유주의에 못지않게 심각한 것이 이른바 진보적 신자유주의입니다. 유럽과 미국의 사민주의 정당들은 신자유주의의 성과와 경쟁력 지상주의를 받아들이는 한편, 경제적 평등보다는 ‘현대적’이며 문화적인 가치들을 추구하느라 자신의 전통 지지층이었던 기층 민중을 배반하기에 이르렀다고 지은이들은 파악합니다. 이런 암울한 현실 진단 위에 지은이들이 내놓는 해법은 단순하다면 단순합니다. 고전적인 계급주의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긴 하지만, 그럼에도 평등과 민주적 가치를 회복하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수자든 다수든 “정체성 물신주의”를 물리치고, 평등과 민주적 가치를 중심으로 투쟁 전략을 짜야 한다는 게 지은이들의 호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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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일 윤흥길 작가의 기자간담회가 있었습니다. 장편 <문신>을 30여년 만에 완간하면서 마련됐는데요, 두 가지 면모가 고스란한 자리였습니다. 겸양과 완고한 작가주의입니다. 출판사에서 집필에서 완간까지 25년 걸렸다고 소개하니, 작가가 면구해 하며 수치를 바로잡더군요. “사실은 32년 됐다”고, “처음 서두 시작한 때로부터 30년 넘었다 하면 창피해서 그렇게 됐다”고요. 1~3권이 2018년 나왔으니, 이달 4~5권까지도 5년이 넘었습니다. 그런 노작가도 수식 하나는 스스로에게 허락했는데, 바로 “필생의 역작”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작가는 “막판에 건강도 너무 나빠져 제대로 끝낼 수 있겠는가, 소설을 쓰다 사람이 죽는 수도 있겠구나 했”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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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전라도 산서마을 대지주 최명배를 둘러싼 일가의 파란만장 서사도 서사지만, 생경해도 생동하는 우리말과 사투리를 찾아 쏟고, 욕지거리를 개발하고, 토속정서를 감각시키기 위한 판소리 율조를 한껏 품었습니다. 아예 “독자들에게 좀 불친절하기로 마음먹고 썼다”는 겁니다. 왜일까요. “파편화된 개인의 문제를 주로 다루”는 근래 한국소설의 풍토에서, ‘윤흥길은 그렇게 쓰지 않는다’는 것까지 말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소설가에겐 체력도 중요하다며 체육에 열심이었던 옛이야기도 들려줬습니다. 자신이 교사였던 1970년대 “학교에서 축구 하는 모습에 반한 동료 교사”가 지금의 아내라고 하도 태연히 얘기해 듣던 기자들이 파안일소했습니다. 겸양과 작가주의만으로 그가 설명될 수 없고, 그 푼더분한 <문신>의 해학성이 어디서 온 것인지도 비로소 알만했습니다. 신간 4~5권의 대마루라 할, 순금이 춘복의 몸에 ‘봄’ 글자 새기는 대목을 놓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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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역사, 그것도 세계철학의 역사를 쓴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일입니다. 이정우(65) 소운서원 원장이 2011년 첫 권을 펴냈던 <세계철학사>는 국내 학자가 혼자 오롯이 그 작업을 해냈다는 점만으로도 상찬의 대상이 될 자격이 충분합니다. 게다가 그 결과물이 담고 있는 성취 또한 놀랍습니다. '전통과 근대, 탈근대'가 서로 어떻게 꼬리를 물고 역사를 철학의 무대로 삼아왔는지 그 전모가 담겼으니까요. 장대한 시리즈의 마지막 4권은 이 무대의 최종장, 근대 철학의 한계를 직면한 현대 철학이 어떻게 새로운 길을 열기 위해 분투했는지를 서술합니다. 이전 1~3권에서 착실하게 닦아온 길들이 이제 하나로 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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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는 현대 철학의 핵심 특징을 '형이상학의 귀환'에서 찾습니다. 다만 이 형이상학은 존재, 영원, 필연을 출발점으로 삼았던 고대 형이상학과 다릅니다. 근대 철학은 과학적 탐구를 위해 고안된 방법들에 존재론적 실재성까지 부여하면서 등질화, 결정론, 인과론 등의 오류를 품은 바 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탈근대 철학은 '존재'가 아닌 '생성'을 일차적인 실재로 파악하는 길로 나아갑니다. 존재가 아닌 무(無), 영원을 전제하는 추상적 공간이 아닌 시간, 필연이 아닌 우연을 통해 "생동감 있게 흘러가는 생성"을 사유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서구 철학은 역(易)과 기(氣)를 근간으로 삼는 동북아 철학, 화(化)를 중심에 놓는 인도 철학과도 회통합니다. 특히 지은이는 '타자의 사유'를 20세기 후반 철학이 일구어낸 가장 중요한 흐름으로 주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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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철학사> 매 권이 나올 때마다 그 내용과 의미를 짚었던 글들을 공유합니다. 장장 13년에 걸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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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자신의 거주지를 옮기는 것, '이주'(migration)는 오늘날 뜨거운 관심의 대상인데, 그 관심은 양극단으로 분포하기 일쑤입니다. 한쪽에서는 이주를 '위협'으로 받아들입니다. 이주민들이 일자리를 빼앗아간다는 인식이 대표적이겠습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이주가 날로 고령화되는 사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해결책이 될 거라고 기대합니다. 진실은 과연 어느 쪽에 가까울까요? 40여년 동안 이주를 연구해온 네덜란드 출신 사회학자/지리학자 헤인 데 하스는 양극단 모두 진실이라 보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이주의 실상은 어느 일방의 기대나 공포에 부합하지 않는, 훨씬 복잡하면서도 현실적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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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국가를 선택하는 사람들>은 이주에 대해 사람들이 흔히 갖고 있는 22가지 오해를 지적하고 이를 설명합니다. 현재 이주자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빈곤과 불평등 문제가 심각한 것에 비해 이주자 비율은 세계 인구의 3% 정도로 유지"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주자를 많이 받아들여도 이주자 숫자가 너무 적어 저출산/고령화 해법 등의 효과까지 기대하긴 어렵다고 합니다. 이주노동자는 이주국 부유층에 경제적 이득이 되지만, 출신국에는 그리 도움되지 못한다고 합니다. 정치적 곡해와 인도주의 단체의 과장 등을 걷어내면, "정확한 정보에 기초해 이주의 혜택과 단점을 논의할 공간이 열릴 것"이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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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제목이 <남의 말을 듣는 건 어려워>(풀빛)입니다. 제목 그대로 남의 말을 듣는 건 참 어렵습니다. 누구나 듣기보다는 말하기를 좋아하거든요. 그림책의 주인공은 잠시도 떠들기를 그치지 않는 어린 물총새입니다. 그런 물총새에게 아빠는 말합니다. "네가 말을 하면, 남의 말을 들을 수 없어. 남의 말을 듣지 못하면, 배울 수도 없단다." 과연 어린 물총새는 아빠의 말대로 남의 말을 듣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요? 숲이 떠나가라 자기 말만 늘어놓는 앵무새 무리, 그리고 그들을 노리는 사냥꾼들에게 잡히는 만나는 시련을 겪은 뒤에야, 어린 물총새는 그걸 깨달을 수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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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도어북스는 세상에 없던 서점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서점을 만들고자 합니다. 어린 시절에는 그렇게 사랑하고 좋아했던 것들이 참 많았으나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사랑하고 좋아했던 것들을 조금씩 잊어버리지요. 잠시 잊고 지낸 소중한 마음, 동심(童心)을 다시 만나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책방을 꾸려갑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잠시 잊고 지낸 동심을 다시 만나야만 비로소 어른이 된다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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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지도 못했지만
당신이 사 준 책상엔 서랍이 달려 있어요
부드럽게 열렸다 느리게 닫히는군요
내부는 눈부신 빛깔의 자작나무예요
당신의 선택이 옳아요 사실은
슬며시 비난했던 그 스피커도 아주 탁월했어요
부드럽게 느리게
누워 있으니 좋군요
흩날리고 있어요
구두에 쌓이기도 하는군요 바깥은
거대한 수거함 내부 같은 밤
누군가 남기고 간 짐들이 빈 거리에 기어 나오는 밤
고급 레일을 사용한 덕분이겠죠
눈은 멈추지 않고 오래 내립니다
오늘 저녁엔
이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부드럽게 열렸다 느리게 닫히는 것이
있어서 좋군요
📖김이강의 시집, <트램을 타고>(문학과지성사)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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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반올림(#)책은 어떠셨나요?
좋았던 점, 아쉬웠던 점 등 기탄없이 의견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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