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해마다 돌아오는 특정 시기에 맞춰 기사를 생산하는 것을 언론사 내부에선 ‘캘린더 기획’이라고 합니다. 책과 출판문화를 다루는 팀에서는 대체로 한 해가 넘어가는 시점에 이런 기획에 집중하곤 합니다. 연말에는 한 해 동안 나온 책들 가운데 꼭 되새기고 싶은 책들을 골라내어 ‘올해의 책’이라는 이름으로 호명하고, 새해 벽두에는 여러 출판사로부터 올해 나올 책들에 대한 정보를 모아 ‘올해의 기대작’이란 이름으로 출간 예정작들을 미리 더듬어보는 식이죠.
한때나마 “책이 안 읽히는데, 책을 소개하는 기사라고 읽히겠냐” 따위의 이야기를 하고 다녔던 것을 반성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여기에 “연말에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유튜브에서 꼽은 ‘올해의 책’ 3권이 모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는 이번 주 홍순철(북칼럼니스트, BC에이전시 대표) 선생의 칼럼( 👉칼럼보기)이 제 부끄러움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올해에도 독서인구의 감소, 출판·독서 지원 예산의 삭감 등 출판문화를 둘러싼 환경은 여전히 위협적이거나 더 나빠질 것으로 전망됩니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여전히 책을 만들고, 읽을 것입니다. 고장 난 녹음기처럼 그저 책이 안 읽히는 세태를 탓할 게 아니라, 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책을 읽고 즐기는 것을 도울 수 없는지 제 부족함을 돌아보고 더 나아지려 노력할 수밖에 없겠다고 다짐합니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2024년 기대작’들을 모았습니다. ‘캘린더 기획’이라지만 여러 출판사의 절실한 분투가 담긴 목록입니다. 물론 ‘한정된 지면에 모든 책들을 안내하지 못하는 아쉬움’은 여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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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여곳이 넘는 출판사들로부터 2024년 출간 예정작들의 목록을 받아 보았습니다. 교양 분야, 문학 분야, 학술·지성 분야로 나누어 소개합니다.😁
📖올해는 세월호 참사 10주기, 생명 사상의 큰 스승 무위당 장일순의 30주기, 실존주의의 대문호 프란츠 카프카의 100주기랍니다. 이에 맞춘 책들은 물론, 로빈 던바의 종교 연구, 아마르티아 센의 회고록 등 눈여겨볼 만한 책들이 많습니다.
📖우리나라 시집의 역사를 쌓아온 창비시선은 올해로 500호, 문지 시인선은 600호를 돌파합니다. 김애란, 이기호, 황정은의 새 장편, 마거릿 애트우드의 단편집과 폴 린치, 욘 포세 등 해외 문학상 수상자들의 신작도 기다려집니다.
📖이정우 경희사이버대 교수의 <세계철학사>, 인류학 창시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대작 <신화학>이 완간 예정입니다. '초주체'에 맞서는 '저주체' 인간형을 논하는 책, <열하일기>의 교합본, 30권짜리 <한국사상선> 등 묵직하지만 흥미로운 책들이 많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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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과 이성애는 공존할 수 있는가?’ 이성애가 감추어 온 성별 불평등과 차별에 눈을 뜬 여성들은 이런 질문을 던지기에 이릅니다. 여성과 남성 사이의 평등하고 생산적인 연애는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남성을 배제한 여성들끼리의 사랑을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합니다. 스위스 출신 프랑스 기자 겸 작가 모나 숄레는 새로 출간된 책 <사랑을 재발명하라>에서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모색합니다. 숄레는 ‘마녀’ ‘지금 살고 싶은 집에서 살고 있나요?’ 같은 책이 국내에도 번역되어 있는 작가입니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그는 이성애가 착오에 불과하다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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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이성애주의자인 그는 가부장제의 폐해에서 자유로운 이성애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기존의 가부장적 이성애가 조장하는 양성간 지배와 복종, 착취와 의존의 메커니즘을 시시콜콜하게 까발리는 것이 그를 위한 첫걸음입니다. 숄레는 가부장제의 폐해에 물들지 않은 평등하고 독립적인 이성애를 ‘깊은 이성애’라 부르며 그를 위한 방안을 찾습니다. 부부가 서로 다른 집에서 거주하며 필요할 때 약속을 잡고 만나는 식의 결합 형태 등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자립적인 여성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소수 남성의 존재에 희망을 걸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현실 속 가부장적 이성애가 노출하는 문제에 비해 그런 대안과 희망은 아무래도 미약해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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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작가를 소개합니다. 일흔살에 첫 소설(2010)을 펴낸 프랑스 작가 클로디 윈징게르. 이제 해 바뀌어 여든넷입니다. <내 식탁 위의 개>는 그가 나이 여든둘에 발표한 소설인데 형식과 내용 또한 경험해본 적이 드물 듯합니다. 이 작가, 68혁명 세대의 기풍을 강하게 풍깁니다. 반산업주의, 반권위주의, 나아가 반합리주의…. 어쩌면 이 감성은 지금 젊은 세대들에게 필요할 텐데 이 ‘할머니 작가’의 매력은 이십대에 그 세계로 들어간 뒤 지금껏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라 동시대 모델로 손색이 없겠습니다. 그는 스물다섯 되던 1960년부터 알자스 보주산맥 자락에 배우자와 정착해 양 목축, 작가, 조형예술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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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작가의 삶을 짙게 농축합니다. 이십대 때부터 “자본주의가 내팽개친 충적세의 한 조각”에 매료되어 왔던 소피-그리그 부부, 늪가에서 두꺼비 울 때 사랑을 나누던, “저 박동하는 질의 음악소리가 안 들리는 거야?”(소피) “(그런 얘기) 그만하지 않으면 덮쳐 버릴 거야”(그리그) 농밀히 대화하던 그들은 그 세계에서 늙고 곧 소멸할 자신(의 육신)을 보게 됩니다. 그 시선은 소멸해가는 숲 세계의 모든 생명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수렴됩니다. 학대와 수간으로부터 도망쳐 부부를 찾은 양치기 개와의 만남이 특히 놀라운 계기가 됩니다. 파멸을 부추기는 산업사회로부터, 자본주의로부터, 인간중심주의로부터 스스로를 추방시켜 온 소설 속 주인공은 이제 소멸하는 것들의 마지막을 전율로써 환대하는 소멸종이 되고자 합니다. 작가가 ‘전지적 짐승 시점’을 구사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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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냥갑처럼 생긴 아파트에 사는 것이 지겨워진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자신의 취향과 생활방식을 반영한 ‘나만의 집’을 짓겠다는 소망을 갖기 마련입니다. 최근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5도2촌족’(5일은 도시, 2일은 시골에서 사는 것)을 꿈꾸며 시골에 주택을 짓는 경우도 늘고 있고요. 이렇게 나만의 공간을 만들려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건축가 지망생, 건축 현장 전문가가 필수로 갖춰야 하는 감각이 있으니, 바로 치수 감각입니다. <건축 스케일의 감>은 관념적인 숫자가 아니라 자신의 신체를 ‘잣대’ 삼아 다양한 치수를 파악해 치수 감각을 높이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일본 건축 전문가들이 만든 아주 실용적인 책이고, 국내 전문가의 감수도 거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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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의 벽돌 크기는 ‘6×10×21㎝’로 규격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벽돌의 이런 크기는 작업자가 한 손으로 쌓아 올리기에 좋은 크기라고 하네요. 흔히 보는 벽돌의 크기도 이러한 과학적 원리가 적용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주변의 모든 사물이나 공간을 ‘신체 척도’로 가늠해보게 됩니다. 어떤 공간을 설계할 때 ‘신체 척도’를 활용해서 효율적이고 불편함이 없는 편안한 공간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알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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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은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살다 간 여성입니다. 여성에 대한 편견이 심했고 교육 기회도 부족했던 그 시기에 그는 독학으로 식물학과 곤충학을 공부했고 세밀화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특히 그가 남아메리카 수리남에 2년 가까이 머물며 관찰하고 답사한 결과를 글과 그림에 담은 책 <수리남 곤충의 변태>(1705)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쉰살이 넘은 나이의 여성이 유럽에서 뱃길로 두 달 남짓 걸리는 낯선 이국 땅까지 연구 여행을 다녀온 것부터가 놀랍습니다. 이 책은 러시아 황제 표트르2세도 구입할 정도로 유럽 전역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만, 그의 사후 메리안의 업적과 이름은 서서히 잊혀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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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여성’ 과학자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진 20세기 말에 그는 오랜 망각에서 건져 올려졌고 그 결과 독일 지폐와 우표에 모습이 새겨지기에 이르렀습니다. 마거릿 애트우드는 소설 ‘홍수의 해’에서 그를 성인(聖人)으로 그리기도 했죠. 새해 벽두에 그의 대표작 <수리남 곤충의 변태>와 <새로운 꽃 그림책>이 번역 출간되면서 한국 독자들도 그의 작업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수리남 곤충의 변태>가 다른 세밀화들과 다른 점은 애벌레와 번데기, 나비 등 변태를 하는 곤충의 한살이 전체를 하나의 그림 안에 다 담았다는 사실입니다. 또 해당 곤충의 먹이가 되는 식물을 배경으로 곤충을 그려 넣어 생태적 맥락을 보여준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화려하고 정교한 채색 동판화들이 눈을 즐겁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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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선 번역가는 '이 길이 내 길이 맞나?' 하는 의심할 겨를도 없이 줄곧 번역가의 길을 걸어왔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 속 주인공들이 하는 영어에 홀렸고, 친구 집 책장에서 뽑아 읽은 <나니아 연대기>에 빠져들었으니, 그리고 좋아하는 원서를 실컷 읽겠다며 영문학과에 진학을 했으니, 어찌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청소년기에 몰두했던 영미 소설들이 데이터로 몸속에 쌓여 있어서 문장을 보면 자동적으로 번역이 됐다"고 할 정도니까요. 그 스스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번역가의 본질 역시 이야기 중독자, 또는 이야기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님도 노진선 번역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업(業)이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게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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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가 직접 꼽은 주요 작품들의 표지. 왼쪽부터 병원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흑백차별을 다룬 <작지만 위대한 일들>(북폴리오), 멕시코 난민의 생존 여정을 다룬 <아메리칸 더트>(쌤앤파커스), 섭식장애를 치료하는 이야기 <먹을 때마다 나는 우울해진다>(심플라이프), 호텔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을 따라가는 <메이드>(마시멜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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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기댈 언덕이 되려, 책으로 일군 공간
북살롱 텍스트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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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살롱 텍스트북’의 가장 중요한 일은 문을 여는 것이다. 부암동에 사는 부부가 서둘러 집을 나서는 주말 아침의 이유가 되기 위해, 크리스마스이브 부산역에서 케이티엑스(KTX)를 타고 지도 앱을 켜고 찾아온 손님의 서울 거점이 되기 위해, 번아웃이 되었다며 문을 열기도 전에 서성이다 들어와 하이볼을 주문한 직장인의 기댈 언덕이 되기 위해, 평일 아침 일찍 채비를 서둘러 인천에서 달려온 두 친구의 후일담이 되기 위해, 퇴근 후 집에 가지 못하고 스카치위스키 탈리스커 한잔을 시켜 숨을 고르는 젊은 친구를 위해, 서점은 쉬지 않고 문을 여는 것이다. 그 곁에 책과 커피, 맥주와 위스키 한잔으로 숨 쉴 곳을 제공하는 것이다. 책과 서점은 당신 곁에 그렇게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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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웅(聖雄)
명량 노량도 눈물겹지만
아아,
판옥선 흘수선 아래 묶여
죽자 사자 노를 젓다 죽어간
장정들
그 숱한 장정들의
처
자식
어미
아비들.
📖김사인의 시, <현대문학>(2024년 1월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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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반올림(#)책은 어떠셨나요?
좋았던 점, 아쉬웠던 점 등 기탄없이 의견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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