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한병철(63)은 물질자본주의의 첨단에 이른 디지털 시대에 대한 비판과 성찰을 마치 잠언과 같은 언어로 담아내 주목받은 재독 철학자입니다. 이번에 출간된 <사물의 소멸>(김영사)을 펴보니, 그의 사유와 감각은 여전합니다. “디지털 질서는 세계를 정보화함으로써 탈사물화한다.”
손에 잡히고 확고하게 존재하는 사물이나 사건과는 다르게 정보는 마치 신기루와 같습니다. 그렇지만 정보가 가져다주는 특유의 흥분과 놀람에 익숙해져, 한병철의 지적처럼 우리는 어느새 우리가 대면해야 할 사물에는 등을 돌리고 신기루 같은 정보와 그것이 일으키는 소음에 우리 자신을 더욱 맞추어 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스마트폰을 쥔 손 안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움직일 수 있다고 착각하면서.
한병철은 ‘고요’에 귀 기울이라고 조언합니다. 정보의 세계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고요의 세계를 결코 용납하지 못합니다. 정보가 아닌, 진짜 사물들이 머무는 그곳에서 우리는 다만 주의 깊게 바라보고 귀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고요하고 수수한 사물들, 곧 평범한 것들, 부수적인 것들, 혹은 통상적인 것들”이 우리를 존재에 정박하게 할 것입니다.
반올림(#)책을 시작하면서, 너무도 당연해진 디지털 세상을 핑계 삼아 또 하나의 소음을 만드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됐습니다. 다만 이건 '책을 위한 것'이라 자위해 봅니다. 님의 전자우편함 속에 쌓이기만 할 쓰레기가 아니라, 책을 통해서 만나볼 수 있는 '고요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통로'가 될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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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올림(#)책 사용설명서
- 매주 월요일 아침 7시 전자우편함에 들어온 반올림(#)책 뉴스레터를 열어봅니다.
- 지난주 나온 신간 가운데 반올림(#)책이 추천하는 5권(이번 주의 반올림)이 무엇인지 확인합니다.
- 어떤 책들인지 대강 파악한 뒤, 👉기사보기로 더욱 풍부한 책 소개를 만나봅니다.
- 미처 책을 볼 여유가 없다면, 책 소개만으로도 어떤 책인지만 파악할 수 있습니다.
- 매주 반올림(#)책 챙겨보는 습관을 들여 여러분의 지성을 반올림합니다.
※ 반복적으로 전달되다보니 반올림(#)책이 스팸메일이나 프로모션함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용하시는 전자우편 서비스에서 반올림책 bookbang@hani.co.kr을 주소록에 추가해주시면 반올림(#)책을 더 쉽게 챙겨볼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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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서양건축사 책들을 보면, 미술사 책처럼 고딕, 고전주의, 바로크, 모더니즘 등 양식(style)의 변천이나 주요 거장 들의 연대기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런데 당대의 공학기술과 막대한 재원, 다양한 인력 등이 오랜 기간에 걸쳐 동원되는 건축의 역사에는 뭔가 다른 게 있지 않을까요? 이를테면 이런 질문들을 품어볼 수 있습니다. 주재료가 여전히 석재였고 아치, 볼트, 돔 같은 구조 형식에도 큰 변화가 없었는데, 왜 15~16세기를 거치며 고전주의가 점차 고딕을 대체하기 시작했을까요? 우리에게 익숙한 지금의 건축과 도시의 풍경은 왜, 언제부터, 누구에 의해 시작된 걸까요? 박인석 명지대 건축학부 교수의 <건축 생산 역사>는 '창작'이 아닌 '생산'의 관점으로 건축을 바라보고 쓴 서양건축사 책입니다. "건축을 한 시대의 총체적 반영이라는 측면에서 건축사를 톺아보겠다는 지은이의 뚜렷한 목적의식은 이전에 볼 수 없던 새롭고 신선한 서양건축사를 만나게 해준다."(최원형 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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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석 교수는 도시와 주거 문제를 깊이 고민해온 건축학자입니다. 그는 예전에 박철수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와 함께 서울 40평대 아파트를 팔고 경기도 용인에 단독주택(살구나무 윗집과 아랫집)을 지었는데, 그 과정을 담은 책 <아파트와 바꾼 집>(동녘, 2011)을 펴낸 바 있습니다.
🐟박인석 교수는 <아파트 한국 사회>(현암사, 2013)에서 한국의 주거 문제에 대해 아파트라는 형식보다 '단지 만들기'가 핵심 문제라는 것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한국의 근현대 주거 역사 100년을 담은 '작은 아카이브'인 박철수 교수의 책 <한국주택 유전자>(마티, 2021)도 함께 권합니다.
🐟건축을 공부한 일러스트레이터 데이비드 맥컬레이는 고딕성당의 예찬자로도 유명합니다. 그의 첫 그림책에서 고딕성당이 지어지는 놀라운 과정을 유려한 그림과 함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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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의 취미는 '살인'입니다! 놀라셨나요? 다행히 정말로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의문사를 연구하는 게 취미랍니다. <아주 작은 죽음들>은 미국 법의학의 기초를 닦은 프랜시스 글레스너 리(1878~1962)라는 여성을 조명한 책입니다. 1944년 미국에서 일어난 28만여건의 의문사 가운데 검시관의 조사를 받은 건 단 1~2%에 불과했을 정도로 법학과 의학이 의문사에 별 역할을 하지 못하던 시절, 의사도 법관도 아닌 50대 여성으로서 리는 하버드대에 법의학과가 만들어지는 데 핵심적인 구실을 했다고 합니다. 그를 대표하는 것은 의문사 현장을 작은 디오라마로 재현하는 '손바닥 연구'입니다. "성급한 결론이나 판단을 내려놓고, 자기가 좋아하는 가설에 맞는 증거만을 발견하고 싶은 마음에 저항하는 법"을 가르친 연구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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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부터 열린 '2022 서울국제작가축제(SIWF)'에는 여러 국외 작가들도 참가했는데, 그중 일본의 소설가 무라타 사야카는 <편의점 인간>으로 2016년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해 일본 밖에서도 주목받는 작가입니다. <지구별 인간>은 때마침 국내에서 출간된 그의 새 책입니다. 20년 가까이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편의점 인간>에서 '정상성'을 강요하는 세상의 편견을 다뤘던 작가는 이번 책에서 아동폭력과 가족제도를 중요한 모티브로 삼고 여기에 판타지와 에스에프적 요소들까지 넣어 버무려냅니다. 폭력과 착취에 내몰린 아이들이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을 것"이라 다짐하는 모습 등 "전개되는 활자들은 시종 어둡고, 질주하는 상상력은 끝내 뒤통수를 후려치는"(김은형 책기자)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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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로 유명한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은 1차대전이 발발한 1914년 오스트리아 시민으로서 자원 입대해 전쟁터로 갑니다. 5년 동안 총탄과 포격이 끊이지 않는 전쟁터에서 그는 노트 왼편에 개인적 일기를, 오른편에 철학적 일기를 기록했습니다. "전쟁터의 한계상황에서 실존의 고통을 잊으며 철학적 작업"을 했던 것이죠. 그의 대표 저작 <논리철학논고>는 논증이나 해설 없이 선언만으로 쓰여 어렵기로 소문나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남긴 기록 <전쟁 일기>는 이 <논리철학논고>의 본문을 이루는 철학적 사유의 최초 자료여서, 고명섭 책기자의 설명대로 "이 단단한 책 속으로 들어갈 문을 열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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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평론가 김기태 세명대 교수는 올해 3월 충북 제천에 '처음책방'을 열었습니다. 지난 30여년 동안 그가 수집한 책과 잡지 초판본 및 창간호 6만5천여종을 모아놓은 공간입니다. 최인훈의 <광장>(1961), 박완서의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1989) 등 한국 현대사와 함께한, "발견과 앎의 기쁨을 주는" 귀한 지적 유산들이 가득합니다. 김기태 교수는 <김기태의 초판본 이야기>에서 이렇게 수집한 자신의 초판본 가운데 15편의 초판본을 골라 서지학적으로 또 문학적으로 읽어나갑니다. 세월의 흔적 가득한 초판본을 본다는 건, "한 시대, 한 역사를 고유하게 품어둔다는 얘기"(임인택 책기자)라 할 만합니다. <서울 1964년 겨울>(1966) '후기'에서 "이 책이 백만부쯤 팔리면 좋겠다"고 한 김승옥 작가의 너스레가 참 재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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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시대를 다룬 <대표 범선 제국>(2010), 유럽인이 아마존에 도착한 뒤 500년 역사를 다룬 <아마존>, 18세기 영국 계몽주의 형성 과정을 다룬 <근대 세계의 창조>, 나폴레옹 전쟁을 세계사적 관점에서 다룬 <나폴레옹 세계사>…. 역사 덕후(역덕)라면 누구나 군침을 흘릴 만한 이 책들을 번역한 사람은, 그 스스로도 역사가 좋아 전공까지 바꾼 역사 덕후인 최파일 번역가입니다. 최 번역가는 셜록 홈즈 덕후이기도 해서, 국내외에서 수집한 438권의 관련 도서를 소장하고 있기도 하답니다. '덕업일치'에 성공한 역덕 번역가의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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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많은 분 환영합니다.” ‘책방죄책감’ 입구에 붙어 있는 문구입니다. 많은 분들이 재미있어하시지만 간혹 진지하게 받아들이시는 분도 계십니다. 저도 마냥 재미로만 붙여 놓은 문구는 아닙니다. 평소 불평등과 양극화, 차별, 젠더 갈등 등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고 불편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사회의 기득권층으로 분류되는 중년 남성으로서 우리 사회의 문제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책방 이름인 ‘죄책감’은 주변의 호불호가 강했지만, 한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다는 주변의 공통적인 평이 있어서 용기 내 지었습니다. 책방에는 주로 불평등, 양극화, 폭력, 차별, 젠더 갈등, 심리 등 제가 가진 ‘죄책감’을 테마로 하는 책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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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부모의 학대로 이미 소녀는 죽어 있었다고 했다
내가 사는 집과 붙어 있는 소녀의 집
이미 나의 다리는 쓸모없는 것이었다고 진술해야 했다
잤어요
자면서 흘렀어요
달
쓰러지면 일어서고
쓰러지면 일어서고
나는 물—다리로 걸어간다
📖신영배 시집 <젤소미나가 사는 집>(문학실험실)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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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반올림(#)책은 어떠셨나요?
좋았던 점, 아쉬웠던 점 등 기탄없이 의견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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