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캘리번과 마녀>(2004) 등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페미니스트 실비아 페데리치(81)의 책 <우리는 당신들이 불태우지 못한 마녀의 후손들이다>(갈무리)를 보다가 몰랐던 사실을 또 하나 알았습니다. 주로 여성들이 뒤에서 서로를 헐뜯는 대화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는 ‘가십’(gossip)은 원래의 의미가 정반대로 변한 것이라 합니다. “고대 영어 단어인 god(신)과 sibb(혈족)에서 유래한 가십은 본래 세례를 받는 아이와 영적 관계를 맺는 대부모(godparent)를 의미했다.” 강한 감정을 동반하는 유대관계를 가리키는 말인데, ‘친밀한 여성 친구’ 등 여성 중심의 관계에 주로 쓰였다고 하네요.
옛날엔 이처럼 긍정적인 의미로 쓰였던 말이, 가부장제가 고착되고 남성 권력이 굳건해지면서 아예 정반대로 바뀌어버렸습니다. 16세기부터 스코틀랜드·잉글랜드 등에서 쓰였던 ‘잔소리꾼 굴레’(scold’s bridle)라 불리는 도구가 ‘가십 굴레’라고도 불렸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재갈과 징으로 혀를 누르고 찔러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 끔찍한 고문도구는, 남성에게 순종하지 않고 자기 말을 하려는 하층 여성들의 머리에 주로 씌웠습니다. 우정과 애정을 뜻했던 여성의 말이 폄하와 조롱을 품은 의미로 뒤바뀐 겁니다.
페데리치는 지구 곳곳에서 여성은 역사적으로 “기억을 엮어 짜는 사람들”(weavers of memory), 곧 과거의 목소리를 미래로 전달시켜 공동체를 가능하게 만드는 존재였다고 새깁니다. 그러니 여성의 말을 조롱하고 폄하해 끝내 침묵시키는 것은 공동체 전체를 무너뜨리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더 많은 ‘가십’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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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가해자를 고발하는 피해자의 말은 곧잘 의심받습니다.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 피해 사실을 아예 꺼내놓지 못하는 경우도, 수사기관을 찾았다가 '사실무근'으로 치부되어버리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피해자의 진술은 엄연한 증거인데도, 재판부는 유독 성폭력 사건에 대해서만 '확증을 가져오라'고 채근합니다. 지방 검사로도 일한 경력이 있는 미국 로스쿨 교수 데버라 터크하이머의 <불신당하는 말>은 피해자의 말을 폄하하는 구조를 분석한 책입니다.
피해자의 고발은 "그런 일이 일어났고, 그 책임은 가해자에게 있으며, 이 일은 중요한 일"이란 뜻을 담고 있지만, '신뢰성 구조'는 여기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불신), 책임은 피해자에게 있으며(비난), 중요하지 않은 일(무시)"로 대응합니다. 배경에는 가부장제에 흠뻑 젖은 문화와 법이 있습니다. 피해자를 무력화시키는 권력의 작동을 직시해야만, 우리는 비로소 인정, 지지, 연대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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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당하는 말>은 미국에서 나온 책이지만, '젠더 문제에는 국경이 없다' 할 정도로 국내외 현실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동녘)는 최근 성폭력 사건과 관련한 국내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책입니다.
🐟'미투운동' 이후 피해자들은 점점 더 강하게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역풍(백래시)도 거셉니다.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등 인식도 후퇴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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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출신의 철학자 발 플럼우드(1939~2008)는 '에코페미니즘'의 대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동안 국내에는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이번에 그의 저작이 처음으로 번역 출간됐습니다. 생전에 남긴 원고들을 모으고 엮은 <악어의 눈>은 이 독특한 학자의 삶과 활동을 전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돕는 책입니다.
플럼우드는 악어와 마주쳐 잡아먹힐 뻔한 경험을 했는데, 이때 자연적 질서 아래 인간은 포식자가 아니라 먹이라는 것을 강렬하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 '포식자에서 먹이로의 전락' 경험으로부터 그는 서구의 인간중심적인 세계관을 깨는 독특한 길을 찾아갔습니다. 인간을 생태적 관점에서 다시 위치시키는 것뿐 아니라 '비인간'을 윤리적 관점에서 다시 위치시키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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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한국어>는 대학에서 강사로 글쓰기를 가르치는 작가 문지혁이 쓴 '오토픽션'입니다. '자전소설'이니 역시나 대학 강사로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는 '1980년생 문지혁'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작가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일상 세계를 그려냅니다. 작가는 전작 <초급 한국어>에서 미국의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친 적 있는 자신의 경험을 담아낸 바 있습니다.
임인택 책기자는 이 소설의 차별적인 매력으로 '범상성'을 꼽았는데, 그것은 아마도 "삶과 사람과 우주의 본질에 관해 무언가를 말해주는" 것(문학)을 찾을 때까지 오직 일상이라는 끝없는 '되풀이'만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마주하는 어떤 태도를 이 소설이 잘 드러내고 있어서일 겁니다. '성장소설'이란 평가 역시, 그래서 붙은 것일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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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문화이론가 레이먼드 윌리엄스(1921~1988)는 리처드 호가트, 에드워드 파머 톰슨, 스튜어트 홀 등과 함께 '문화연구'를 새로운 학문 분야로 개척한 대가로 꼽힙니다. 윌리엄스의 문화연구 관련 저작들은 <기나긴 혁명> <마르크스주의와 문학> <시골과 도시> 등 국내에도 몇 권 번역 출간되어 있는데, 대체로 두텁고 까다롭습니다.
영국의 문화연구자 짐 맥기건이 엮은 <문화와 사회를 읽는 키워드>는 비교적 짧은 그의 글들을 20편 추려내고 시대 순으로 펼쳐, 입문자도 부담없이 윌리엄스를 접할 수 있게 돕는 책입니다. '문화는 일상적이다'는 명제 아래, 이른바 '고급 문화'와 다른 일상의 문화에 주목하고 여러 문화적 힘들이 서로 겨루는 양상까지 짚어낸 윌리엄스 사상의 전체적인 모습을 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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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윌리엄스 주요 저작들의 번역본을 찾아보니, <문화와 사회 1780~1950>(1958)는 1988년 출간된 뒤 절판된 모양입니다. <기나긴 혁명>(1961)은 2021년에 개정판이 재출간되었습니다. 70년대 저작인 <키워드>도 2010년에 번역 출간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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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 산수유꽃, 복사꽃이 피어나 좋은 계절을 반깁니다. "응당 속된 꽃들 봄에 붉게 물드는 것 싫어"(이인로의 시)하는 매화, "굳은 절개 고고함이 백이와 같"(곽진의 시)은 수유꽃은 옛날 선비들에게도 상찬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붉은 복사꽃과 자두꽃은 '도리화'로 엮여 선비들에게 조금 천시받는 경향이 있었나 봅니다. 이규보는 "농익은 살구꽃의 비단 같은 화려함 비웃"는 배꽃을 좀 더 좋아했던 모양이고요.
봄을 맞아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한 책을 추천해봅니다. 울산대 국어국문학부에서 고전문학을 가르치다 정년퇴직한 성범중 명예교수와 같은 학부 안순태·노경희 교수가 함께 쓴 책 <알고 보면 반할 꽃시>는 52가지 우리 꽃을 노래한 한시들을 모아서 소개합니다. 아름다운 꽃 그림과 공예품의 도판도 시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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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온한 토끼 마을에 배가 고픈 동물들이 하나둘 찾아왔습니다. 장마, 이웃마을과의 싸움 등으로 갈 곳이 없어진 동물들입니다. 처음에는 뚝딱뚝딱 음식을 차려주는 등 찾아온 동물들을 반겨주던 토끼들은 슬슬 화가 납니다. "우리 살 곳도, 먹을 음식도 없는데 자꾸 몰려오면 어쩌자는 거야." 토끼 마을은 과연 '손님'들과 어우러져 잘 살아갈 수 있을까요? 난민 문제를 생각하게 해주는 그림책 <우리 마을에 온 손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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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은 늘 서성이는 게 아닐까요
서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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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9일, 책방 열기에 딱 좋은 날이어서 글을 모시는 한글날 문화의 거리 골목 안쪽에 책방 문을 열었다. 성호씨와 로운씨가 운영하던 ‘그냥과보통’이 책방의 전신이다. 좋은 인연으로 책방을 인계받고 그 자리에서 1년 6개월을 보내고 지금의 자리로 옮겨 3년을 보내고 있다. 길을 서성이는 따뜻한 마음들을 불러들이며 다섯 살이 되어가고 있다. 책방은 여전히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이다. 전자책과 수많은 인터넷 플랫폼 속에서 책방이라니. 그것도 11평도 안 되는 공간에. 지인들은 걱정부터 했고, 그 걱정은 5년째 유효하다. 여전히 아침 11시면 문을 열고 책방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오늘은 또 어떤 사람이 서성거리다 문을 열고 들어올지 궁금하다. 주변의 걱정과는 다르게 용감하게 잘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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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에 뽀송뽀송
땀 냄새가 사라진다
엊그제 먹었던 떡볶이 자국
연필 자국까지도
빨랫줄에 걸리면
향긋한 기억만 남는다
괜히 짜증 나서
단짝 영은이 울리고 온 날
빨랫줄에 걸리고 싶다
📖장진화 시집 <어린이문학>(2023년 봄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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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반올림(#)책은 어떠셨나요?
좋았던 점, 아쉬웠던 점 등 기탄없이 의견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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