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외딴섬에서 유리병 속에 편지를 넣어 저 망망대해에 띄웁니다. 누군가에게 가닿을 수 있기나 한 건지 알 수 없지만 그렇게 말을, 그 속에 담은 마음을 던집니다. 어머니의 언어였던 독일어로 시를 썼지만 유대인이란 이유로 나치에 의해 부모가 학살당하고 자신은 강제 노역을 했던 시인 파울 첼란이 자신의 글쓰기가 바로 이 ‘투병통신’(投瓶通信) 같다고 했다지요. 재일조선인 작가 고 서경식(1951~2023)이 2008년께 출판인들을 격려하며 들려줬던 이야기( 👉기사보기)입니다. 출판이란 투병통신을 위한 유리병 같은 거라고, 그러니 고독해도 힘내어 계속 유리병을 만들어 던지자고.
따지고 보면 ‘작가’로서 서경식 자신도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고국과 일본 그 어디에도 자리가 없는 이산자 재일조선인, 정치범으로 투옥된 두 형과 어떻게든 건사해야 하는 가족…. 암흑과 절망 속에서 “내 마음속에서 일어난 사건을 표현하고 싶다는 갈망에서 발표할 대상도 없이 원고를 쓰기 시작”했고, 그렇게 기약 없이 던진 유리병들이 끝내 일본을 넘어 고국 사회에까지 가닿았습니다.
서경식이 떠난 뒤( 👉기사보기), 그가 유리병을 던진 마음을 되새겨봅니다. 외딴섬에 표류해야 하는 지독한 고독이 없었던들 그렇게 간절한 마음이 치솟을 수, 또 그것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가닿을 수 있었을까요. 절망 속에서도 한결같이 진실을 직시하며 희망을 건져올릴 수 있었던 그의 사유는 그가 투병통신을 ‘발신’했던 바로 그곳에 서야 비로소 더듬을 수 있을 듯합니다. “피, 문화, 영토라고 하는 강고하게 보이는 기반 위에서 발신하는 게 아니라, 자신은 그러한 강고한 기반과 괴리되어 있다는 자각에서 발신하는 것”이었으니.
님, 뜻깊은 성탄과 새해를 맞이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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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은 혹시 ‘페미니스트 킬조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킬조이’(killjoy)를 그대로 해석하면 ‘기쁨을 죽이다’란 의미입니다. 의역하면 ‘파티의 흥을 깨는 사람’ ‘분위기를 망치는 사람’ ‘산통을 깨는 사람’ 정도가 됩니다. ‘페미니스트 킬조이’라고 하면 페미니즘과 관련된 말이나 행동으로 분위기를 깨는 사람을 지칭할 텐데요. 최근 출간된 <페미니스트 킬조이>를 쓴 페미니스트 철학자 사라 아메드는 페미니스트를 조롱하고 불편해하는 사람들에게서 이 표현을 도로 뺏어 옵니다. 작가는 스스로 나서 ‘페미니스트 킬조이 프로젝트’를 실행하면서 ‘페미니스트 킬조이’끼리의 연대를 촉구하지요. 또 대중에게 ‘페미니스트 킬조이’가 기꺼이 되자고 제안합니다. 그것이 곧 생존할 수 있는 길이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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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과 2018년 ‘미투’ 운동을 거치면서 더 많은 여성이 ‘페미니즘’이라는 렌즈를 통해 한국 사회의 젠더 불평등을 명료하게 인식하게 됐습니다. 페미니즘은 우리 사회의 변화를 부추기는 한 축이 됐는데요. 거대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 이에 반발하는 흐름 또한 강해진 것도 사실입니다. 최근 게임업계에서 있었던 ‘손가락 사건’만 봐도 그렇지요. 일부 남성들은 ‘페미니즘=남혐’이라는 비뚤어진 시각으로 페미니스트들을 공격하고 위협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에 주저하는 순간도 있을텐데요. 그런 주저함이 생길 때 이 책을 꺼내 살펴보세요. 놀라운 통찰력과 촌철살인의 지혜가 담겨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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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는 사라 아메드가 런던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내에서 성적 괴롭힘을 당하는 여학생들을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2013년부터 3년간 집필한 책입니다. 학생들과 함께 책을 읽고 블로그로 소통하며 완성한 책인데, 책 전반에 걸쳐 다양한 사례와 생동감 넘치는 묘사가 빼곡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 역시 수월할 리 없습니다. <온갖 무례와 오지랖을 뒤로하고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는 42명의 저자가 삶의 자리에서 경험한 불쾌함과 분노, 씁쓸함과 승리의 기억 등 온갖 것을 각각 5~6쪽 글로 꾹꾹 뭉쳐낸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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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 고유섭(1905~1944)을 아십니까? 한국미술사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아마 알 수도 있겠지만, 상당수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지은이인 미술사학자 유홍준은 “한국 미술사의 할아버지는 위창(오세창)이고 아버지는 우현”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 말처럼 우현은 한국미술사의 토대를 닦은 선구적 인물입니다. 그런 우현의 생애와 업적을 다룬 <고유섭 평전>이 출간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우현의 평전으로는 처음이라고 하네요. 우현과 같은 인천 출신 소설가 겸 평전 작가 이원규가 자료를 섭렵하고 우현의 가족 등 관계자들을 인터뷰해서 그의 삶을 충실하게 되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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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은 경성제대 최초의 미학 전공 학생이었고 졸업 뒤에는 모교의 미학연구소 조교를 거쳐 1933년부터 숨을 거둘 때까지 개성부립박물관장으로 일하면서 한국미술사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그는 한국 미술의 특징을 “질박, 담소, 무기교의 기교”라 요약했고, 특히 탑파 연구에서 우뚝한 성과를 냈습니다. 일각에서는 그의 관점을 두고 야나기 무네요시의 영향을 받은 식민사학이라 비판하기도 하지만, 우현은 황무지와도 같은 한국미술사를 개척하고 튼실한 씨앗을 뿌린 선구자로서 “문화독립운동가”라 이를 법하다고 평전 지은이는 평가합니다. 우현의 보성고보 동기이자 절친이었던 공산주의자 이강국, ‘개성 삼걸’이라 불린 그의 세 제자(황수영, 진홍섭, 최순우) 등 주변 사람들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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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를 맞아, 신앙 없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해봅니다. 가족이 없었던 라일라에게는 믿음이란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성인이 되어 성경 구절을 필사합니다. “네가 태어난 날 아무도 네 탯줄을 잘라주지 않았고, 네 몸을 물로 깨끗하게 씻기지도 않았다. …네가 태어난 날 너를 반기는 사람이 없어 너는 들판에 버려진 것이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로 버둥거리는 것을 보았고 내가 너에게 말했다. 너는 피투성이더라도 살아라.” 에스겔서 16장 4~6절입니다. 라일라의 남편이 된 70대 목사는 왜 하필 에스겔서냐고 묻습니다. 입문하기엔 내용이 어렵고 슬픔으로 가득하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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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더라도 상관없다. 적어도 에스겔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들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있다”는 게 라일라의 답입니다. 이 말의 의미, 즉 탄생이 곧 수난이 되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아름다운 여정이 바로 이번 소설 <라일라>라 하겠습니다. 어떤 일로 집 문앞에 내쫓겨 있는 너댓살 라일라를 한 여성 부랑자가 말도 없이 데리고 가는 걸로 소설은 시작합니다. 버림받은 아이 라일라입니다. 라일라는 뒤로도 거듭 버림과 상실을 경험합니다. 삶을 불신하므로 라일라는 천착합니다. “세상의 어떤 일들이 왜 그렇게 일어나는지 그 이유를” 말이죠. 도대체 어떤 삶은 왜 시작되고, 지속되어야 하는지랄까요. 버락 오바마가 지극히 ‘애정’했던 미국 작가 매릴린 로빈슨(80)의 이 책에 '그럼에도 살아라' 말하는 이유가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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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물리학 발견으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함께 양자역학이 꼽힙니다. 아원자의 미시세계를 설명하는 양자역학은 세계를 보는 근본 관점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삶을 새로운 영역으로 옮겨놓았습니다. 양자역학이 정립한 이론에 따라 인류는 원자폭탄을 제조했고 수많은 첨단 기술을 개발했죠. 그렇게 큰 영향을 끼쳤는데도 양자역학은 탄생 100년이 지난 시점에도 제대로 이해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이론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단언했을까요. 양자이론은 여전히 수수께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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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출신의 이론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67)가 쓴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2020)은 양자이론을 이해할 수 있는 아주 새로운 길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이 책의 원제는 ‘헬골란트’입니다. 북해에 있는 조그마한 섬이죠. 1925년 23살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원자 세계 내부 전자의 기이한 움직임을 이해해보려고 홀로 이 섬에서 며칠을 골몰하던 중 마침내 전자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수식을 끌어냈습니다. 양자이론의 탄생이었죠. 이 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해 양자이론의 신비를 해명하는 데로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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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장애인 등 소수자를 겨냥하여 증오와 혐오를 쏟아내고 때로 폭력까지 저지르는 모습이 이 시대 남성의 대표적인 표상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새로운 차원에서 남성과 남성성에 대한 사유와 이론이 적극적으로 개발되어야만 하는 절박한 배경입니다. 이제 남성은 과거처럼 권위를 휘두르는 마초 가부장이 될 수도, 그렇다고 능력주의 사다리의 상층에 올라앉은 한 줌의 자유주의적 '따뜻한' 남성이 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끌어안은 고통과 울분을 제대로 이해하고 해결할 수 없기에, 일부 남성들은 자신이 획득하기 어려운 소수자성에 대한 공격 수위를 높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측면에서 일본의 사회비평가 스기타 슌스케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으로 산다는 것>에서 펴는 '약한 남성' 이론에 귀를 기울여봄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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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가 주목하는 대상은, 기성 사회구조가 무너져내리면서 더 이상 다수자로서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반면 소수자처럼 정체성 정치에도 기댈 수 없는 남성입니다. 이들은 경쟁, 인정, 생산성, 능력주의 등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에서 밀려난 '잔여' 또는 '잔여물'로서 깊은 상처와 고통을 입지만, 그 규범에 갇혀 자기 내면의 괴로움을 제대로 감당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일부 남성들이 소수자들을 '적'으로 오인해 그들과 '피해자 경쟁'을 벌이는 데 몰입하는 배경입니다. 지은이는 자신의 약함을 직시하고 '제대로 상처받는', 대안적인 길을 제시합니다. 그러면 "누구를 죽이지도 않고 여성을 증오하지도 않고 자신을 죽이지도 않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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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성'은 오늘날 페미니즘의 가장 뜨거운 연구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국에서는 문화비평가 최태섭이 <한국, 남자>(은행나무)라는 책에서 이를 분석하는 시도를 편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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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로 끄집어낸 4·3…뒤따른 고문과 수형
작가 현기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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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상처 가운데 하나인 제주4·3은 오랫동안 침묵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이를 역사의 수면 위로 끌어올린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것은 문학이었습니다. 작가 현기영의 소설집 <순이 삼촌>은 바로 그 길을 연 대표적이고 독보적인 작품으로 손꼽힙니다. 이 작품을 낸 뒤 작가는 군사정권의 고문과 수형의 고통을 받았지만, 그 작업이 '용기' 이전의 문제, 말하자면 "운명이 시킨 것"이었다 합니다. 작가는 올해 <제주도우다>란 대작으로 제주4·3을 다시 한 번 총체적으로 다루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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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영 작가가 이후 쓴 자기 책들을 꼽아봤습니다. 왼쪽부터 역사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1983), 자전적 성장소설인 <지상에 숟가락 하나>(1999), 386세대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누란>(2009), 4·3의 비극으로부터 살아남은 자 안창세의 목소리로 젊은 세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제주도우다>(2023)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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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속 '쉼'의 공간으로 자리 잡으려
한양문고&카페 명동눈스퀘어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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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탐방을 즐기는 독자들에게는 미로처럼 복잡한 명동 한복판에서 ‘읽는 쉼’을, 명동 쇼핑을 즐기다 잠시 쉬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는 ‘마시는 쉼’을 제공하고자 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고객을 유치하려는 다른 쇼핑 및 먹거리 매장과 다르게 비어 있는 공간을 충분히 둔 것도 바로 ‘쉼’이라는 열쇳말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
그렇지만 당장의 매출을 올리는 것에 연연하고 싶지는 않다. 복잡한 도심 속에서도 명동의 새로움을 읽고, 명동에서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지금의 목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명동 한양문고에서 만나자!’가 약속의 대명사처럼 회자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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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물쇠 수리공 마이클
열쇠를 잃은 이들의 문을 열어주는 마이클
그가 하루에 여는 문의 수는 매일 다르지만
열지 못하는 문은 없지 기필코 열지
그 문이 유일하게 희망인 사람이 있어서
마이클은 유일한 사람이 되지
오늘은 날씨를 수리하느라 하늘을 오래 쳐다보는 마이클
바람을 맞으며 찾아온 한 사람에게
오늘은 기어이 멀리 가야 하는 그 사람에게
자물쇠 수리공도 열어줄 수 있는 문은 없어서
하늘 가득한 비구름을 오래 쳐다보는 마이클
📖심재휘의 시, <유심 2023 겨울호>(설악·만해사상실천선양회)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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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반올림(#)책은 어떠셨나요?
좋았던 점, 아쉬웠던 점 등 기탄없이 의견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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